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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MC(총무)
댓글 1건 조회 286회 작성일 16-09-28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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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28일 오전 9:49 38읽음

 

우리나라 주류세력은 누구인가? 3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하니 그 문제는 그렇다 치고 결론은 개혁적이고 개방적인 소현세자는 권력에 눈 먼 비정한 아버지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 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 인조에 의한 소현세자의 독살설은 역사적으로 정설은 아니지만 당시 소현세자 죽음 상황을 살펴보면 인조의 독살설이 확실하다. 그것도 모자라 소현세자 보다 더 국제적, 경제적 감각이 있다고 알려진 소현세자 부인 공빈과 자기의 손자이자 소현세자의 아들까지도 인조는 죽이고 만다.) 인조는 조선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왕으로 기록될 만하다.
 
어쩌든 권력을 잡으면 필연적으로 분파되기 마련이듯이 사림파는 우리가 '당파싸움'이라고 불리는 당쟁에 돌입하게 된다.

이제 완전한 양반사회가 형성되고 그들이 조선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며, 자기들끼리의 피나는 당파싸움을 해가며 조선이 망할 때까지 권력 싸움에만 몰두한다.
 
그래도 초기 당파 싸움은 지금의 여, 야 개념처럼 서로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었다 처음엔 선조 때 이조 전랑 인사문제 같은 사소한 문제로 시작한 분파가 동인, 서인으로 다시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으로 나눠지면서 서로를 견제해왔다.
 
그러나 앞서 말한 인조 쿠테타로 서인이 정권을 접수한 뒤 부분적으로 왕의 선호도나 왕비 선택에 따라 남인 등에게 정권을 잠시 넘겨주기는 했지만 숙종 때 그 유명한 장희빈 사건 등을 거치면서 서인 중에서도 '노론(송시열 계열)‘의 완전 일당 독재 체제에 돌입 하게 된다.

이들 노론 일당에게는 당이나 가문 그리고 영원한 숭명주의에 의한 망한 명 말고는 나라도 백성들도 안중에도 없었다.
 
영조가 탕평책으로 당쟁을 무마 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그 당파 싸움 틈바구니 속에서 개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진(이설이 있지만) 사도세자만 비참한 죽음으로 내 몰고 만다. 영조는 당파 싸움 때문에 자식을 죽인 공개적인 비정한 아버지가(인조는 비공개적임)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조금이라도 개혁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들은 그가 왕이던, 세자던, 관료이던, 백성이던 거의 모두 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물론 세계 어느 역사에서도 비슷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는 특히 심하다.

왜 그럴까?

우리나라 사람들 피에는 보수의 피가 더 많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아님 기득권층의 자리지키기가 그토록 권고한 것일까?
 
우리나라 봉건적 역사에서 마지막 개혁이 가능한 군주였던 '정조'가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이미 엄청난 세력을 키우고 있던 노론 세력에 밀려 개혁을 제대로 완수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가 죽고나서 엄청난 반동의 정치가 왔을 뿐이다.

우리나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정조 이후로는 왕 까지도 자기들 마음대로 갈아 치우는 노론 일당 그중에서도 안동김씨 풍향 조씨 세도정치 독재가 대원군이 집권 할 때 까지 지속 된다. (대원군도 잠깐 개혁 정치를 취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주류를 바꾸자는 개혁이 아니었다.)

대원군의 개혁도 쇄국정치 등으로 실패로 끝나고 조선 말기에 와서 극심한 주류세력들의 착취에 반발하여 농민들이 들고 일어서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래도 가장 성공적 이었다고 할 수 있는 '동학 혁명' 때도 '전봉준'이 라는 장수 또한 봉건적인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당시 잔반 출신인 전봉준의 사고로는 어쩔 수 없다 해도, 농민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외세 침략'에 반대하고 현재의 국왕을 지키자는 ‘존왕양이’를 구호로 내 걸었다. 남도 지방의 '김개남'‘김화중’ 등 다른 동학 장수들은 새로운 나라 건설을 부르짖었지만 대세는 아니었다.
 
어쩌든 밑바닥으로부터 주류가 바뀔 수도 있었던 절호의 기회가 외세의 힘과 지도자의 아직은 봉건적 사고 때문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일제시대. 놀라운 것은 그 당시 주류세력이었고 가문의 영광에만 눈이 멀어 나라를 잃어버린데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노론 일당이 일제 시대에도 일제와 협력하며 우리나라의 주류를 그대로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을 우린 친일파라고 부른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해방 후에도 도태 되지 않고 이승만등 반공 세력과 손을 잡고 우리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며 현재 까지 이어 오고 있다.
 
그들은 너무나 변신을 잘 하기에 우리의 역사의 커다란 변동이 있을 때 마다 옷만 바꿔 입은 채 주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일제면 일제, 반공주의자들이면 그들과 함께, 군부 독재면 또 그들과 손잡고, 어떨 때는 민주화 세력과도 손잡고, 기어코 주류세력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들은 아주 잠깐 잠시 주류세력으로부터 밀리기도 했지만(역사적 격변기 때) 그러나 어느새 그 자리에 또 다시 꿰차고 들어 앉아 단 한 번도 주류에서 영원히 벗어 나본 적이 없다.
 
그러니 오늘 날도 잘도 변신해가면서 주류를 형성한 그들이 오만불손하게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이 새로 정권을 잡은 세력에 빌붙어 자기들 기득권 유지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역사의 반복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말들이 있다.

헤겔은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고 했다. 하지만 엘빈 토플러는 '역사는 필연적으로 반복 되지는 않는다.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라고 했다.

이 두 석학의 말을 종합해보면 '반복되는 역사는 필연적으로 보이지만 필연적으로 반복되는 역사는 없다. 피할려면 피할 수 있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바로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하는 이유이다.

류성룡은《시경》에 이르기를 "내가 그것을 징계하여 후환을 삼간다."라고 하여 《징비록》을 지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전란 후에 모든 사사건건 시시비비를 가려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우리에게 치욕적인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여 후손이 이를 경계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은 그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위대한 업적이다.

하지만 류성룡의 염려는 후손인 조선보다 전쟁 당사자인 일본에서 더 인기를 얻었다. 기가막힌 일이다.

그리고 조선은 징비록이 나온 지 30년 조금지나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하고 만다. 임진왜란을 겪어놓고도 전혀 반성이나 대비가 없었다. 이런 조선사대부들의 역사에 대한 무지가 경술국치까지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복되는 역사를 통하여 교훈을 얻고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나라 주류세력은 단지 자기들 권력유지와 가문의 안위에만 치중하고 치욕의 역사는 짐짓 모른체 하면서 끊임 없이 반복해온 우리의 아픈 역사를 만드는 데에도 주역이며 주류세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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