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고함] 거문고 타는 베토벤 '김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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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고함(孤喊)] 거문고 타는 베토벤 ‘김마에’ [중앙일보]
왜 우리나라에는 베토벤이 없는가? 정말 없는가? 그럼 과연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나설 사람이 있는가? 베토벤의 심포니나 소나타를 듣는 감동을 한국 작곡가의 작품 속에서 발견한다고 외칠 사람이 있는가?
순간적인 주관적 감상 속에서 그런 언사가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겠으나 베토벤 수준의 마에스트로를 우리는 발견할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나라에서 서양음악 한다는 사람은 고전파나 낭만파 음악은 흉내 낼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곧 죽어도 컨템퍼러리 음악만 한다고 한다. 왜냐? 컨템퍼러리 음악은 관객을 철저히 외면해도 체면이 서기 때문이다. 아무도 못 알아먹기에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고전파나 낭만파의 음악과 같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자기 실력, 내면의 공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혼의 울림이 없기 때문이다.
거문고 협주곡 ‘사비’를 작곡한 김대성씨(左)와 초연 무대에서 연주한 허윤정씨. [임진권 기자] | |
반만년의 축적을 거쳐온 우리 민족의 고유하고 다양한 음악전통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하루아침에 비열한 음악으로 전락했다. 일제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음악인, 그리고 해방공간이라는 난맥상의 시련을 견디어낼 수 있었던 음악인은 대부분 친일파들이었다. 20세기를 통하여 서구의 모든 아방가르드 전통을 흡수하여 가장 치열하게 자기류의 음악을 만들었던, 백남준의 스승 김순남 같은 이는 남로당에서 활약하였고 ‘인민항쟁가’를 작곡하였다는 이유로 남북에서 모두 저주받는 비극적 생애를 살아야만 했다.
많은 사람이 한국인들은 감수성이 풍부하여 세계적인 음악가가 많은 것처럼 생각한다. 완벽한 착각이다. 음악의 역사는 연주의 역사가 아니라 작곡의 역사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세계적인 연주가의 이름은 들어보았을지 모르나 위대한 작곡가의 이름은 별로 들어볼 기회가 없다. 연주인들은 음악의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다. 옛 산조의 연주인들은 그들 본인이 연주자인 동시에 작곡자들이었기에 그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지난 토요일(22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국악작곡축제가 있었다. 우연히 나는 그곳에 들렀다가 참으로 긴장된 초연의 순간을 목격했다. 작곡가 김대성!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일반 독자들 중에는 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만큼 많은 작품을 20년 가까이 긁어댄 인물이기 때문이다. 뮤지컬 ‘태풍’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 뮤지컬의 작곡자로서 그의 다양한 작품활동의 한 측면을 접했을지 모른다.
그는 공주사대에서 서양음악작곡을 전공했다. 현대음악을 기발하게 작곡하고 싶은 생각이 들자 대전의 줄풍류 명인 임충수 선생에게 거문고를 배웠다. 그러다가 거문고라는 악기의 신비한 마력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일반인들은 거문고 하면 가야금과 비슷한데 소리가 둔탁하고 노이즈가 많은 재미없는 악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문고는 우리나라 국악기 중에서 역사가 길고 신성하며(‘거문’이라는 말은 신적이라는 함의를 지닌다), 독특한 색깔을 지닌 악기로서 기악의 중심 역할을 했다. 현존하는 고악보의 대부분이 거문고 악보라는 사실은 다른 악기가 거문고에 준하여 연주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의 모든 지터(zither) 악기는 가는 줄에서 굵은 줄로 순차적인 배열이다. 그러나 거문고만은 가는 줄과 굵은 줄이 불규칙하게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고정적인 괘와 유동적인 안족이 선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 또 손가락으로 튕기지 않고 술대라는 막대기로 친다. 언뜻 상상키 어려운 괴이한 악기다.
왜 악기 자체가 이런 불규칙하고 잡스러운 배열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음색의 콘트라스트를 위한 것이다. 거문고는 하느님(神)과 소통하는 악기이기 때문에 우주 삼라만상의 다양한 색깔을 동시에 담아야 한다. 가야금은 연주자의 오른손이 화려하지만, 거문고는 왼손의 기법이 다양하고 그윽하다. 농현의 깊이가 가야금과는 또 다른 차원의 굴림이다. 하늘의 명랑함과 땅속의 어두움이 우려대는 왼손의 찰나에서 수없이 왕복한다. 황병기는 말한다. “가야금곡을 거문고로 치면 요상해지고, 거문고곡을 가야금으로 치면 유치해진다.”
거문고를 마스터하지 않으면 거문고곡을 쓸 수가 없다. 오선지 위에서 해결될 수 없는 ‘거문(玄)’ 차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가야금과는 달리 거문고는 마이크와 친구가 못 된다. 마이크로폰을 갖다 대면 그 그윽한 울림들이 소멸되고 마는 것이다.
새 세대 거문고의 명인 허윤정은 말한다. “김대성 선생의 요번 거문고협주곡은 거문고가 실컷 노래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타기 편안하고 또 타기 어려운 길의 조화가 ‘사비’를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엊그제 우면당에서 안산시립국악관현악단의 연주로 초연된 김대성의 거문고협주곡 ‘사비’는 타협 없이 살아온 그의 작곡인생의 한 결정이다. 그는 서양음악의 전공자로서, 사라진 ‘우리 소리’를 찾으러 팔도강산 방방곡곡을 헤맸다. 그리고 백제의 소리, 낙화암에서 붉은 꽃잎처럼 떨어져 백마강의 물결로 스러져간 백제 아낙들의 한 맺힌 사랑의 사연을 찾고 싶어했다. 그 한 모티프를 『대악후보(大樂後譜)』의 ‘정읍’ 가락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16세기 『금합자보(琴合字譜)』에 나오는 혼합박인 6대강구조에서 백제 리듬의 한 원형을 찾았다. 그리고 화성적으로는 전통적인 아악에서 나타나는 헤테르포니적 화성을 근간으로 서양의 3화음, 불협화음을 수용했다.
나는 국악 작곡에 불만이 많다. 국악관현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면 아주 유치한 균등박의 타악기 지배구조에 모든 소리가 갇혀 있다. 리듬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강요하듯 듣는 이들을 압박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이건음악회에서 미니멀리즘의 정예 연주자들인 스미스 콰르텟이 우리 ‘아리랑’을 연주했는데 내 생애에서 접했던 최고의 ‘아리랑’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 컨템퍼러리 ‘아리랑’의 가능성을 뛰어넘는 거문고협주곡의 웅장한 심포니를 나는 김대성의 ‘사비’에서 발견했다.
우리에게도 분명 베토벤은 있을 것이다. 단지 발견치 못하고 있을 뿐이다. 남북이 경색된 이 마당에 남북한 국민 모두가 한번 김대성의 ‘사비’를 들어볼 기회가 있기를 빌면서….
도올 김용옥, 사진=임진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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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오현방님의 댓글
오현방 작성일
펌질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하게 됩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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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도올의 글입니다.<br />
도올의 글에서 우리나라의 음악 수준을 얼추 짐작(?)해 볼 수 있고, 우리나라 악기인 거문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정호님의 댓글
박정호 작성일
좋은 소식은 함께 나누는 것.우리가 못 보고 지나치게 되는 것을 발췌해 주는 일은 대 환영.<br />
모두 모두 할 말 없으면 따온 글이라도 남겨 주구랴---정보 사회인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