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2) 뇌경색 물리치고 돌아온 테너 신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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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현방
댓글 0건 조회 3,547회 작성일 09-03-28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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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고음불가 시절 있었죠”
[뉴스 쏙] 한겨레가 만난 사람 뇌경색 물리치고 돌아온 테너 신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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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1까지 야구선수…백인천과 중학 동기
악써도 소리 안나 대학땐 음악 포기할뻔

병마로 ‘어눌한 발음’ 됐지만 보란듯 재기
목소리처럼 탁 트인 깨달음 “좌절 마세요”


어눌한 말투가 처음엔 귀에 걸렸다. 성악가에게 어색한 발음은 치명적일 것이다. 하지만 테너 신영조(66) 교수에겐 7전8기의 증거다. 뇌경색을 이기고 무대로 돌아온 훈장이다. 그와 마주하자 극적인 성공담에 대한 기자 특유의 기대가 왠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그에게도, 삶은 좌절과 극복의 연속이었고 성공은 그 과정 속에서 잔잔히 모습을 드러내온 것이었다. 국내 3대 테너로 꼽히는 신 교수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 많은 음악계에서 가난과 병마를 이겨내고 맨손으로 국내 최고의 성악가가 된 이로 유명하다. 45년 성악가의 길을 걸어온 그가 지난 2월 34년 동안 재직한 한양대 음대에서 정년을 맞았다. 새학기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이 가득한 서울 한양대 교정에서 그를 만났다.


-정년 퇴임하셨는데도 굉장히 바빠 보이십니다.

“아직도 일주일에 다섯 시간은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음대는 다른 단과대와 달라서 실기는 일대일 수업이고 저하고 공부한 친구들은 졸업까지 책임지고 가르쳐야 해요. 그래도 많이 여유로워지긴 했어요. 한참 아이들 가르칠 때는 매일 강의하느라 내 연주를 준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성악가 신영조라는 이름에선 어려움을 극복한 일화가 먼저 떠오릅니다. 야구선수였다가 성악으로 전공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젊은 시절 이야기 좀 들려주시죠.

“제가 중앙중학에 입학할 때 던지기 시험에서 왼손 일등을 했어요.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생활이 어려웠는데 체육 선생님이 야구를 하면 장학금을 준다고 권하셨어요. 전 야구가 싫었어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서 야구를 했고 장충고에 야구부가 생겨서 잘하지는 못했지만 스카우트됐어요. 경동고 출신 백인천씨가 우리 중학교 동기인데 계속했으면 같이 야구했겠지요.”

-어떻게 성악으로 방향을 바꾼 건가요?

“고1 때 (야구를) 너무 하다 보니까 팔이 빠져버렸어요. 그냥 빠진 게 아니고 심각해서 깁스하고 병원에 한달 누워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라디오에 심야 클래식 프로가 있었어요. 완전 문외한인데도 어린 나이에 좌절을 겪고 있다 보니 음악에 매료가 됐죠. 사실은 작곡을 하고 싶었어요. 음악 선생님한테 찾아가니까 물끄러미 보시면서 ‘저기 피아노에 가서 도를 한번 눌러봐라’ 그러더라고. 그런데 도가 어딨는지 알아야지. 허허.”

당시 음악 교사는 그에게 “작곡하려면 피아노는 몇 년 쳐야 하니 안 되겠고 노래를 해봐라”고 권했다. 새 희망이 생긴 신 교수는 노래의 꿈을 키운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 형편에다가 가족들이 완강하게 반대했다.

“음악 하면 밥이나 먹을 수 있느냐는 거였죠. 그것도 남자가. 의대를 가거나 교사를 하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데…. 더구나 시골 출신인 저희 부모님들은 아주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5형제 중 장남인 그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야구를 그만둔 뒤 음악에 매달렸다. 개인 교습비도 없고 피아노도 따로 없어 교회에 다니면서 혼자 연습했다. 그리고 결국 한양대 음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음대에 진학한 뒤 더 큰 시련을 만난다.

“입학해서는 정말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그런데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나니까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았어요. 음악을 못하겠다 싶어 군대 다녀와서 진로를 바꾸기로 했어요.”

-그렇게 원하던 음악의 길을 걷게 된 건데요?

“소리가 안 났어요.”

당시의 절망이 떠오르는 듯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학에 와 보니까 나보다 너무 잘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 음악 하지 않는 사람은 이해가 안 될 텐데, 나이에 맞춰서 소리가 어디까지 나는 그런 것이 있어요. 그런데 고음도 안 나오고 아리아도 부를 수가 없는 거예요. 테너면 기본적으로 에이(A)음이 나와야 하는데 아무리 악을 써도 이게 안 나. 후배들은 너무너무 잘하고. 그래서 아, 난 역시 안 되는구나, 그랬죠.”

그는 음악의 꿈을 접고 입대한다. 성악가에겐 금기인 담배도 입에 댔고, 제대 뒤 농대나 법대로 편입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군 생활 말년에 뜻밖의 일이 생겼다.

“소리내기는 잊어버리려고 의식적으로 줄담배를 피우면서 2년여를 제대 뒤 계획만 세웠어요. 제가 전방에서 근무했는데 그때는 간첩이 많이 넘어오고 그러던 때였어요. 하루는 혼자 보초를 서는데, 가만히 노래를 불러 봤어. 그런데 예전엔 안 나오던 소리가 나오는 거야. 에이음도 나오고, 비플랫(B#)도 나오고 하이 시(C)도 나오는 거예요.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는데, 누가 뒤에서 총부리를 딱 갖다 대는 거야. ‘아 간첩이구나, 이제 소리가 나오는데 죽게 생겼구나’ 했죠. 그런데 우리 중대장이었어요. 그날따라 임시근무를 하던 중대장이 노랫소리가 들리니까 조용히 올라온 거였지. 중대장이 ‘너 음대를 나왔는데 군대를 왜 이렇게 전방으로 왔냐. 내가 노래 부를 수 있게 소원 들어줄게 말해봐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대 6개월 정도 남겨두고 레슨 받게 외박을 좀 허락해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일요일마다 노래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군대를 안 갔으면 노래를 못 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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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경색 물리치고 돌아온 테너 신영조(66)
노래를 다시 시작한 그는 졸업 직후 이탈리아 정부가 주는 1년짜리 단기 유학 장학금 시험에 합격해 유학 길에 오르게 된다.

-장학금을 받아도 유학 생활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랬죠. 이탈리아도 1970년대에는 못살아서 아르바이트도 할 게 없었어요. 이탈리아 노동자 200만명이 독일 가서 일하던 때였거든요. 그래서 나도 독일로 가서 목재공장에서 불량품 고르는 일을 했어요. 4개월 하니까 7200마르크를 주더라고. 그 돈으로 뮌헨국립음대에 가서 시험을 봐서 학교에 들어갔어요.”

궁하면 통하는 것을 체득하며 자기 인생을 만들어 간 그는 “일단 부딪쳐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강조했다. 그의 삶이 그 증거처럼 보였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너무 못사니까 사실 좀 부끄럽기도 했어요. 독일에서 코레아는 그냥 노르트(북쪽)나 쥐트(남쪽)나 똑같았어, 남한에는 제네랄 박, 북한에는 제네랄 김, 그랬거든. 하지만 그러니깐 장학금 같은 건 쉽게 주는 편이어서 유학을 할 수 있었던 거지.”

어렵게 유학을 이어가던 그는 뜻밖에 쉽게, 그것도 서른셋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된다. 유학 도중 잠깐 귀국했다가 눌러앉게 된 사연이 길었다.

“1975년 졸업하고 독일에 있다가 잠깐 귀국하게 됐어요. 국립오페라단 단장인 오현명 선생이 우리나라 오페라가 열악하니 혹시 한국에 올 수 있으면 <파우스트>에 출연해 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출연료는 없지만 돌아가는 여비는 주겠다고 하더라고. 그동안 얼마나 변했을까 궁금해서 5년 만에 한국에 왔어요. 오페라 끝내고 돌아가려는데 한양대 김연준 총장이 붙드는 거야. 그래서 지금까지 한양대에서 일하게 된 거예요.”

-일찍 출세를 하신 거네요?

“출세는 무슨 출세? 교수 되면 뭐해. 봉급도 쥐꼬리에 집도 없고 그랬는데, 허허. 그때가 군사독재 시절이어서 비탄조 가요가 많이 불렸었죠. 그래선지 방송사들마다 가곡의 밤이나 아리아의 밤 같은 행사가 절정이었어요. 오페라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섭외 오니까 한국이 괜찮구나 생각했던 거지. 하지만 사실 80년대 초까지는 다시 돌아갈까 갈등이 심했어요.”

세계적 오페라 가수를 꿈꾸는 그로서는 세계무대에 대한 열망을 떨치기 어려웠다. 귀국하기 직전 그는 독일 슈투트가르트 극장 오디션에 합격한 터여서 아쉬움도 컸다.

하지만 국내에서 그는 승승장구한다. 100회 넘는 독창회와 수천회에 이르는 연주회를 비롯해 수많은 오페라에 주역으로 출연했고,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도 섰다. 스승으로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교육과정과 수업을 정비하고 연습을 독려해 한양대 음대가 ‘한양고교’라고 불릴 정도로 지독하게 애를 썼다.

그러던 2001년, 그에게 이번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가 왔다. 뇌경색이었다.

-뇌경색은 사실상 성악가로서는 사망선고 같은 것 아닙니까?

“연주회를 다녀오는데 아내가 ‘여보, 당신 말이 좀 이상해’ 하더라고. 제가 연주 끝나면 늘 소주 대여섯 병은 마셨어요. 집에 와서는 술 깨니까 한 병 더 마시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날은 음악 끝나고 술 한잔해서 그런 것 같지가 않고 좀 이상했어요. 바로 병원에 갔는데 머릿속에 실핏줄이 막혔다는 겁니다.”

뇌경색은 약이 없다고 한다. 운동하고 약 먹고 조심하는 것밖에 없었다. 몸의 병은 마음의 병으로 이어졌다. 3년 넘게 연주도 못하며 지내야 했다. 그바람에 그는 2년 동안 공황장애에 시달렸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고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거예요. 젓가락질도 안 되지, 사람들을 만나도 옛날처럼 말이 잘 안 나오지…. 노래하다가 쓰러지면 죽는다니 노래는 못 하고, 가르치는 것까지 안 하면 정말 미칠 것 같아서 힘들어도 학생들 레슨은 계속했어요.”

병과 함께 살아가기로 마음을 비운 덕분이었을까, 그는 결국 무대로 돌아왔다. 2005년 기력을 되찾은 그는 재기 독창회를 열고 다시 무대에 섰다.

-병을 이겨낸 비결이 따로 있나요?

“한 3년 지나면서 ‘그래, 이게 늙어가는 증거다’ 하고 마음이 바뀌었어요. 가벼운 운동도 하고 사람도 만나면서 마음을 풀어갔어요. 그러니까 자신감이 다시 생겨요. 지금도 여전히 말하기가 좀 어렵지만 마음은 편안해요.”

그는 뇌경색이 마음의 여유를 주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전화위복이다. 대학 초년 시절 고음이 안 나오던 이유도 이제 알 것 같다고 했다. 그는 1970년 연주회 사진을 보여줬다. 지금과는 다른 날씬한 음악도가 사진 속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온몸으로 체득한 삶의 이치를 들려줬다.

“너무 혹사시켰던 거예요. 이때 제가 53㎏이었어요. 이런 몸에 연습만 죽어라고 하니까 소리가 제대로 나오겠나. 군대 가서 2년 쉬어서 소리가 나왔던 거죠. 사람은 누구에게나 때가 있어요. 특히 성악가는 그때를 위해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해요. 안 된다고 좌절하지 말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 자신을 다스리는 거, 그게 중요해요.”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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