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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개막 1분전.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무대에서 워밍업을 한다. 벌떼가 윙윙거리는 듯한 소리가 난다. 잠시 후 바이올린을 든 악장이 박수를 받으며 등장하면 객석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무대는 더 환하게 밝아진다. 악장이 일어서서 머리를 끄덕이면 오보에 수석주자가 길게 A음을 내고 여기에 맞춰 튜닝을 하고 나면 침묵이 흐르고 곧 지휘자가 뜨거운 박수 갈채와 함께 등장한다.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시작되기 직전의 무대 풍경이다.
| | | 독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 | | |
이때부터 음악의 마법이 펼쳐지면서 알쏭달쏭한 오케스트라의 수수께끼도 시작된다. 지휘자와 단원들은 서로 한 마디 대화도 하지 않으면서도 일사불란하게 의식을 치러 나간다. 오케스트라에는 청중이 잘 모르는 직업상의 비밀, 내부의 ‘불문율’이 있다. 튜닝할 때는 관악기-현악기 순으로, 수석 주자-평단원 순으로 한다. 다음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오케스트라의 10가지 비밀’이다.
1. 백스테이지 분장실을 따로 쓰는 사람은 지휘자와 악장 뿐이다
오케스트라의 악장(樂長ㆍconcertmaster)은 객석에서 볼 때 제1바이올린의 맨 앞자리, 즉 지휘자의 바로 왼쪽 자리다. 지휘자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간다. 악장은 오케스트라 단원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지휘자가 악장과 악수를 나누는 것은 오케스트라 전체와 인사하는 것이다. 오케스트라가 해외 순회공연을 할 때 악장을 협연자로 내세우기도 한다. 시즌 중에도 한 두번은 협주곡을 연주한다. 악장은 뛰어난 독주 기량은 물론 앙상블을 잘 이끌어가는 리더십이 필수다. 단원 가운데 연봉이 가장 높은 것은 물론이다. 공연 때 백스테이지에 개인용 탈의실을 쓸 수 있는 것은 지휘자와 악장 뿐이다. 나머지 단원은 남자 단원, 여성 단원끼리 같은 탈의실을 사용한다. 영국에서는 악장을 ‘리더(leader)’라고 부르지만 이탈리아에서는 ‘spalla d’orchestra’라고 한다. ‘오케스트라의 어깨’라는 뜻이다. 그만큼 책임이 무겁다는 얘기다.
2. 지휘자가 등장할 때 오케스트라가 일어서는 것은 악장 마음 먹기에 달렸다.
| |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지휘 사이먼 래틀) | | |
지휘자가 입장할 때 단원들이 존경의 표시로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일어날지 그대로 앉아있을지는 악장이 결정한다. 대개 오케스트라를 책임지고 있는 음악감독(상임지휘자)일 경우엔 존경의 표시로 일어난다. 객원 지휘자 가운데 나이 지긋한 세계적인 거장일 경우에도 일어서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지휘자가 무대에 나온 다음 오케스트라 전체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는데 이것은 청중의 박수 갈채를 함께 받겠다는 뜻이다. 지휘자가 단원들에게 보내는 존경의 표시다.
뉴저지 심포니 악장 에릭 위릭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한번은 러시아에서 온 객원 지휘자가 자기가 무대에 들어설 때 일어나라고 명령한 적이 있다”며 “이것은 자존심 강하기로 소문난 단원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행동”이라고 말했다. 커튼콜이 거듭되면서 관객들의 박수가 잦아들 때 어느 순간 퇴장할 지 결정하는 것도 악장의 몫이다. 커튼콜 때 지휘자가 오케스트라 단원 전체를 일으켜 세울 때도 악장이 일어서야 다들 일어난다. 악장이 그대로 앉아 있는 경우는 청중의 박수를 지휘자에게만 돌리겠다는 존경의 표시다. 이때 지휘자는 악장과 악수를 나누면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다. 그러면 나머지 단원들도 일어선다.
3. 오케스트라 단원도 박수를 친다.
박수 갈채는 청중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협주곡이 끝나고 객석에서 협연자에게 박수를 보낼 때 지휘자는 물론 단원들도 함께 박수를 치기도 한다. 양손에 악기와 활을 들고 있는 바이올린 단원들은 양손은 고사하고 한손도 쓸 여유가 없다. 이럴 땐 바이올린 활로 보면대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가볍게 발을 굴러 박수를 대신한다. 한 손으로 악기를 들고 있는 관악기 연주자의 경우엔 다른 한 손으로 악기를 들고 있는 손등을 가볍게 두드린다. 지휘자는 지휘봉을 보면대에 올려 놓고 양손으로 손뼉을 치거나 지휘봉으로 보면대를 가볍게 두드린다. 물론 타악기 주자나 악기를 바닥에 세울 수 있는 튜바 연주자의 경우는 양손을 이용해 아낌 없이 박수를 보낸다.
4. 동료 단원이 연주 도중 실수해도 절대 쳐다보지 않는다.
언젠가 뉴욕 필하모닉 단원 중 한 명이 실수한 동료 연주자를 쳐다봤다가 공연이 끝난 뒤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벌어진 적이 있다. 관객에게 ‘바로 저 사람이 삑사리를 낸 단원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연주 도중 인상을 찌푸리는 것은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낸 ‘상품’에 결함이 있다고 스스로 떠들어대는 것이다. 옆 단원과 연주 도중 잡담을 나누는 것도 금물이다. 객석에 아는 사람이 앉아 있다고 손짓이나 눈짓으로 아는 체 하는 것도 실례다.
오케스트라 단원은 악기에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가 아니라면 악기를 만지작거리지 않는다. 특히 다른 단원의 곡중 솔로가 연주될 때는 더욱 조심한다. 악보도 넘기지 않는다. 곡중 솔로로 눈부신 활약을 펼친 곡에서는 연주가 끝난 다음 지휘자가 연주자 개인이나 특정 파트를 따로 일으켜 세워 노고를 치하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를 ‘단독 인사(solo bow)’라고 한다. 교향악단 단원들이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5. 단원과 포옹하고 키스하는 지휘자도 있다.
연주가 끝나면 지휘자는 보통 악장과 가볍게 악수하면서 인사를 나눈다. 양손을 들어 단원들에게 존경과 고마움을 표하기도 한다. 연주회 프로그램이 모두 끝나고 커튼콜이 거듭될 때는 악장뿐만 아니라 현악 파트의 앞줄에 앉아 있는 수석급 주자들과 악수를 나누기도 한다. 어떤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쪽으로 걸어들어가서 그날 특별히 독주 부분을 잘 연주한 단원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기도 한다. 첼리스트 출신 지휘자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는 단원과 포옹하고 키스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로스트로포비치 같은 거장이니까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지만, 젊은 지휘자가 그랬다간 동성애자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6. 빈 필하모닉은 해외 공연 때 여분의 현악기를 들고 다닌다.
빈 필하모닉은 해외 연주 여행을 할 때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파트의 보면대에 파트당 하나씩 여분의 악기를 걸어 놓는다. 악장과 수석 주자 악기의 줄이 갑자기 끊어질 때를 대비하는 것이다. 빈 필하모닉 단원들은 대부분이 빈 국립오페라 소속 오케스트라를 겸하고 있어 극장 소유의 악기 한 벌이 따로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할 때 강한 터치 때문에 피아노 줄이 끊어지면 연주를 중단하고 조율사를 불러 현을 갈아끼운다. 하지만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할 때 협연자의 바이올린 줄이 끊어지면 즉시 악장이 자신의 바이올린을 협연자에게 넘겨준다. 악장의 바이올린 줄이 끊어져도 옆 사람이 자기 바이올린을 넘겨 준다. 악장은 바로 뒷사람에게 바이올린을 넘겨 받고 그 뒷사람은 다시 뒤에 앉아 있는 단원에게 악기를 넘겨 받아 계속 연주한다. 줄이 끊어진 협연자나 악장의 바이올린은 앞에서부터 차례로 뒤로 전달해 맨 뒤에 앉아 있는 단원이 백스테이지로 가서 줄을 교환해 온다. 평단원의 경우는 연주가 계속되는 동안 무대 뒤로 슬그머니 빠져 나가 줄을 갈아 끼운 다음 다시 연주에 합류한다. 대부분의 현악기 주자들은 연주복 주머니에 한 벌의 줄을 여분으로 갖고 있다.
7.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는 막간에 포커 게임을 즐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는 막간에 백스테이지에서 포커 게임을 한다. 1940년부터 시작된, 오래된 전통이다. 여행하는 기차나 버스 안에서, 리허설 휴식 시간에도 포커 게임이 벌어진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며 칩을 바꿀 여유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게 현금 박치기다. 기본 베팅액은 2달러에서 8달러. 특히 푸치니의 ‘투란도트’를 연주할 때는 중간에 두 차례 휴식시간을 갖는데 각각 38분과 29분간이다. 포커 게임을 하기엔 좋은 시간이다.
| | |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 | |
8. 일본 교향악단은 연주가 끝나고 옆 사람과 고개 숙여 정중히 인사를 나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오케스트라에서는 연주가 끝난 후에 같은 악보를 보는 2명의 연주자나 옆 단원이 서로 악수를 나누는 것이 전통이다. 일본 교향악단의 단원들은 두 명씩 서로 마주보고 정중히 절을 한다.
9. 동료 단원의 장례식 후 첫 공연에선 ‘추모곡’을 연주한다.
교향악단에 따라 다르지만 주로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베토벤 교향곡 제7번의 ‘알레그레토’,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등을 연주한다. 시카고 심포니에서는 은퇴를 앞둔 마지막 고별 공연에 참가한 고참 단원을 위해 팡파르까지 고안했다. 거의 Eb장조로 연주하는 것인데 누가 따로 작곡한 것도 아니고 금관 파트 단원들이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10. 여성 단원 비율이 40%를 넘어서면 앙상블이 더 좋아진다.
요즘 미국 교향악단에서 신입단원 선발 때 1차 오디션에서는 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을 막기 위해 커튼을 치고 연주하도록 한다. 최종 오디션까지 커튼을 사용하는 교향악단도 3개나 된다. 덕분에 아시아계 단원과 여성 단원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국내 교향악단도 일찌감치 여초(女超)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독일과 동구권에서는 여전히 남성 비율이 압도적이다. 오케스트라에서 여성 단원의 비율이 10% 미만일 경우엔 별 문제가 없지만 점차 높아질수록 앙상블 능력이 저하되고 다수 집단(남성)과 소수 집단(여성)간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싹튼다.하지만 이 비율이 40%선을 넘어서면 다시 앙상블 능력이 좋아진다는 분석이 있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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