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담만유 8. 냉면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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冷麵有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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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만큼 맛 없는 음식이 있을까?
또 냉면만큼 맛 있는 음식도 찾아 보기 힘들다.
냉면은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의 두 종류가 있다. 평양냉면은 육수와 동치미 국물을 배합하고 면에 메밀이 많이 들어간다. 때문에 면은 질기지 않고 메밀의 고소한 맛이 입 안에 감치게 들어오고 시원하고 담백한 국물이 속을 풀어준다. 함흥냉면은 면에 전분질이 많아 면이 질기고 동해에서 나는 가자미 식해나 명태회를 고명으로 한 비빔 냉면이 주를 이룬다.
나는 특히 평양 냉면의 그 네 맛 내 맛 없는 그 매력에 홀딱 빠진 지 오래다. 원래 매운 맛을 즐기지 않는데다가 어릴 때부터 “피양” 출신이신 집안 어르신들이 집에서도 즐기시던 평양 냉면의 맛에 길들여진 덕분일 것이다.
평양 냉면은 메밀을 많이 쓴다. 메밀은 찰기가 없어 툭툭 끊어진다. 제대로 평양냉면을 하는 집에서 먹는 냉면은 메밀의 구수하고 아릿한 맛이 그 특유의 질감과 함께 입 속에 어리는데 그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상적인 미각의 호사라고 할 수 있다. 평양냉면을 한다고 해 놓고 전분을 잔뜩 써서 고무줄 같은 탱탱한 면을 자랑스레 내놓는 냉면집은 간판을 부숴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는 평양냉면이라면 적어도 메밀을 육 할 이상 써야 한다는 고집을 갖고 있다. 전분은 최소한으로. 아니 아예 넣지 말아야 한다.
냉면은 메밀이라는 독특한 재료를 쓰기 때문에 면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다른 면류와는 다르다. 탕탕 쳐가면서 계속해서 면발을 손에 감고 늘리는 중국식이나 칼국수를 만들듯이 둘둘 말아 칼로 치는 방식이 아니다. 메밀은 찰기가 없기 때문에 뜨거운 반죽을 구멍으로 뽑아서 나오는 면발을 찬 물에 바로 넣어 식혀서 면을 만들게 된다. 때문에 전분이 들어가게 되면 면을 뽑기가 수월한 장점은 있지만 전분을 많이 넣게 되면 메밀이 자랑하는 오묘한 풍미와 질감을 잃게 되니 이는 곧 냉면이 아니라 육수에 넣은 쫄면 정도가 되는 격이다.
평양 냉면은 육수가 생명이다.
육수를 내는 방법은 명가라 자부하는 집 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하는 육수를 소개하자면, 우선 좋은 양지머리를 깨끗하게 피를 빼서 써야 한다. 돼지고기를 같이 써서 육수를 뽑으면 소고기와 어우러져 복합적인 맛을 낼 수 있으나 더러 돼지 냄새가 냉면에 창궐할 수 있기에 고수가 아니라면 돼지고기 육수는 권하고 싶지 않다. 혹 돼지고기 대용으로 복합적인 맛을 내고 싶다면 다시마를 많이 집어넣고 닭발을 같이 넣는다. 닭발은 삼계탕 국물이나 닭곰탕 같은 국물을 낼 때 다량 집어넣고 끓이면 감칠 맛이 나는 국물을 내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요리재료다. 다시마는 천연조미료의 역할을 한다. 잘 한다는 냉면집에 가서 입에 얼얼하도록 들어오는 인공조미료의 냄새는 정말 싫다. 그러나 몇몇 냉면집에서 느껴지는 천연조미료의 풍미는 아마 이 다시마에서 나온 것일 게다.
이렇게 재료를 뭉근하게 끓여서 육수를 우려내면 되는데, 그렇다고 끝이 아니다. 동치미 국물과 섞어야 한다.
동치미 국물은 무우를 주재료로 쓰는데, 비싸지만 동치미를 담글 때 배를 같이 넣어주면 좋다. 전에 읽은 책 중 대한민국 최초의 육군 대장 백선엽씨가 쓴 "군과 나"(지금은 개정판으로 제호가 '길고 긴 여름날 6월 25일'이라고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라는 한국전쟁 회고록에서 평안도 강서 출신인 저자가 평양을 점령하고 나서 먹은 냉면을 두고 국물 맛이 사이다 같은 별미였다고 기록한 부분이 있다. 얼마나 맛있었으면 50여년이 지나서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회고록에 남겼을까? 사이다 같이 톡톡 쏘는 국물은 아마도 잘 담가둔 동치미 국물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동치미 국물을 육수와 반반 섞는다.
혹 육수의 풍미를 즐기고 싶거나 아니면 동치미의 알싸한 맛을 즐기려면 이 비율은 달라져도 상관없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냉면의 정신이다.
냉면의 정신?
무슨 정신 나간 소리인가, 하고 반문할 지 모르겠지만 냉면에는 냉면의 정신이 있다.
그건 넘치지 않고 오히려 모자라는 것이 낫다는 정신이다. 과유불금過猶不及의 정신이다.
육수는 너무 진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맹숭맹숭해야 한다. 찰기 없는 면발이나 진하지 않은 국물이 바로 냉면이 지니는 결핍의 미학이다.
실제 평양 냉면의 명가라고 하는 집으로 냉면의 초보자들을 데리고 가면 이게 도대체 무슨 맛이냐고 투정하는 중생들이 있다. 불쌍한 중생들. 조미료와 매운 양념, 질펀한 고기 맛, 무조건 진하게, 뜨겁게 별별 재주를 다 부려가며 만들어낸 음식들에 닳고 닳아진 이 가련한 중생들의 입에 평양 냉면의 담백함은 아무 맛도 없는 싱겁고 시답잖은 음식으로 치부되기 쉽다.
그러나 평양 냉면은 진정한 맛의 최고봉의 자리에 서 있는 음식이다. 먹는 사람들에게 별스런 맛으로 아부하지 않고 넘치는 맛이 아닌 모자란 맛으로 우리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때문에 면이 면 같지 않게 툭툭 끊어지고 육수는 육수답지 않게 담백해야 한다.
이 평양 냉면에 매운 고명을 듬뿍 얹어서 주는 집들이 대부분인데 그러면 이 냉면의 모자란 맛을 선사해 주는 육수를 느낄 수 없게 된다.
어느 집에 가면 냉면 육수를 얼려서 마치 샤벳처럼 내는 집이 있다. 일종의 고객 만족 서비스인 셈이라 여름철에는 인기를 구가할 수는 있지만 냉면의 정신에는 위배된다.
냉면이 가장 맛 있는 온도는 섭씨 4~8도 정도일 것이다. 이 온도에서 물은 가장 밀도가 높아진다(영상 4도) 이 이하로 내려가면 밀도가 다시 낮아진다.
삼천포로 빠지는 격이지만 이 온도에서 물이 밀도가 높아진다는 점은 생각해 불 만하다. 겨울에 호수나 강물이 얼면 윗부분부터 얼게 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물질은 온도가 낮아지면 밀도가 높아지는데 물의 이런 특성 때문에 물 속에 있는 고기들이 얼음에 갇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신기한 창조주의 섭리이다.
아무튼 육수의 99%를 구성하는 물맛이 가장 좋을 때 먹어야 한다. 또 그 이하로 내려가면 맛을 느끼는 혀의 미뢰가 감각이 둔해진다. 한 마디로 섬세한 냉면의 맛을 느끼지 못한다는 얘기다.
겨울철에는 좀 다르다.
옛날 북녘에 살던 선인들은 추운 겨울 밤 메밀로 국수를 만들고 김장독에서 김치나 동치미 국물을 얼음을 깨서 부어 냉면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겨울철에는 미뢰가 반응할 수 있는 온도도 낮게 설정된다고 하니, 이 경우는 다르다. 여름에 너무 차가운 냉면을 먹는 것은 건강에도 좋지 않고 맛도 못 느끼게 되니 별 소득이 없는 것이다. 다만 시원한 감은 있겠지만 그게 어디 맛인가?
차가운 것도 정도가 있어야 한다.
냉면에 따로 넣는 양념으로는 매운 양념 말고도 겨자와 식초가 있다.
겨자는 아주 살짝만 면에 얹고 식초도 조금만 육수에 뿌려 먹어야 한다. 겨자는 메밀의 맛을 보충해주고 식초는 육수에 상큼함을 더해준다. 또 여름철이면 삽시간에 대장균이 육수 안에서 증식이 되는데, 식초는 살균효과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넣어야 한다.
냉면에 얹는 고명은 야단스럽지 않아야 한다.
계란과 동치미 무우가 나오는 것은 기본이다. 계란과 무우는 메밀과 궁합이 잘 맞고 차가운 음식을 먹음으로 생기는 식체를 예방한다. 또 무우는 메밀이 갖고 있는 독성을 해독하는 성분도 갖고 있다.
메밀은 원래 우리 나라에 자생하기도 했지만 우리 사촌 몽골족이 고려 시대 쳐들어 와서 많이 퍼뜨렸다고 한다.
세계를 제패한 몽골족이 정복을 실패한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지금의 베트남과 일본과 고려였다고 한다. 베트남은 후일 프랑스, 미국, 중국이 싸워서 별 소득을 얻지 못한 나라인데 아마 그 험한 지세와 밀림의 덕을 입었을 것이다. 일본 같은 경우는 가미가제의 덕분이라 하겠고.
그런데 이 고려라는 나라는 별종이었다.
몽골과 민족적 기원이 같긴 했지만 이미 한반도로 몰려 농경민족이 돼 버린 족속들인지라 얕보고 덤볐던 몽골족은 박서 장군이 지키던 작은 성 하나를 점령하기 못했다. 이 때 한 노병이 말하길, “내가 테베 장군을 따라 멀리 헝가리와 폴란드까지 다니면서 별별 놈들과 싸워봤지만 이 성을 지키는 장수와 병사들처럼 잘 싸우는 이들은 보지 못했다.”라고 한탄을 했다고 한다. 또 지금의 용인 부근 처인성에서는 승려 출신 김윤후에게 정벌군 사령관인 살리타이가 화살을 맞아 전사하기도 했고 충주성에서는 노비 출신 군대에게 혼줄을 놓기도 했다.
이렇듯 강한 고려가 원 세조 쿠빌라이 때 조공국이 되고 원나라 황실과 고려 황실이 일가 친척처럼 되어 고려의 국왕이 몽골족의 부족장 회의인 쿠릴타이가 열리면 새로운 황제를 선출하는 데 캐스팅 보트를 쥐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싸움 잘하는 이웃 사촌이자 사돈, 부마 국가에게 보내는 견제 장치를 은밀히 두기도 했는데, 메밀이 그 중 하나였다.
메밀이 갖고 있는 독성을 섭취하고 고려인들이 약해지거나 질병에 걸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메밀을 고려 전국에 퍼뜨렸다고 한다. 그러나 수 십 년이 지나도 고려인들이 메밀로 인해 병에 걸렸다는 보고는 없었다. 오히려 메밀을 부쳐 전을 해 먹고 가루를 내 면을 만들어 먹고 잘도 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고려인들의 악착스러움을 보고 몽골인들은 고개를 가로저었을 것이다. 천하 독종들이다….
고려인들이 메밀을 먹고도 아무 탈이 없었던 것이 바로 고려인들이 즐겨 먹던 무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본도 그렇다. 국수를 먹는 식습관은 송나라 때 일본에 전해져 사찰과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퍼지고 17세기 에도 막부 시대에는 일반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음식이 됐다. 일본에서도 무우를 갈아 메밀 국수에 양념으로 넣어 먹었기에 그 풍미가 좋아지고 독도 해소됐다. 무우에는 메밀의 독을 중화시키고 오히려 그 독이 체내에서 순기능을 하도록 하는 성분이 있다고 한다.
이 외에 오이 같은 것도 고명으로 얹어 먹는다. 색깔로도 보기 좋고 영양학적으로도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박이나 토마토 같은 야단스러운 고명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냉면을 내는 집에 가면 냉면보다 더 즐기는 것이 있는데, 그건 메밀을 끓인 면수다. 어떤 집에서는 고소함을 더하려고 메밀을 살짝 볶은 다음 끓여서 주는데, 그것 또한 좋다. 어떤 집은 육수를 뜨겁게 혹은 차갑게 해서 주는데 그것도 좋다. 그런데 요즘 냉면집에 가면 이 면수나 육수를 홀홀 불어가며 냉면을 기다리는 재미가 없다. 아무리 냉면을 잘 하다고 해도 면수 대신 물을 먼저 내 주는 집에는 두 번 다시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 면수나 육수, 수육을 내지 않는 집 치고 제대로 냉면 하는 집을 못 봤다. 만일 면수나 육수, 수육을 안 내는 집이라면 그 집은 직접 국물을 뽑고 면을 만드는 집이 아닌, 외주제작에 의존하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특히 술 마신 다음날 이 뜨거운 면수에 간장과 겨자를 살짝 넣고 마시면 요것만큼 좋은 숙취해소 음료가 없다. 이 간장을 넣은 면수와 냉면 육수는 살짝 간이 된 것이 우리 몸의 성분과 같아서 물보다 흡수가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더구나 메밀이 숙취제거에 좋다고 하니 냉면은 최고의 해장음식인 것이다. 그런데 술 마신 다음날 찾아간 냉면집이 면수를 내오지 않으면 내가 화가 나, 안 나?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xml:namespace prefix = st2 ns = "urn:schemas:contacts"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는 장소에서 김정일이 특유의 호방한 말투로 김대중 대통령께 여쭈었다.
“진지 잘 드셨습니까?”
“에~ 잘 먹었습니다. 옥류관에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 옥류관 냉면, 맛있죠. 거 술 마신 다음날 먹으면 속 풀이에 최곱네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 김정일을 평가했다. ‘저 인간, 인간성은 어떨지 몰라도 술과 음식을 아는 인간이다.’
평양 냉면을 모르는 주당은 주당이라 할 수 없다.
서울의 명동, 을지로 5가, 청파동, 장충동 등지에는 내노라 하는 냉면의 명가들이 있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가서 먹었던 냉면집들은 그대로 나의 단골집들이 됐다.
이 냉면을 좋아하는 유전인자는 평안도 서북 출신의 유전인자로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다.
다만 이제는 그 맛집에서조차 메밀과 전분의 비례가 잘 안 지켜지고 있고 메밀 맛과 육수 맛도 달라진 집들이 여럿 된다.
동두천에서 내가 먹었던 최고의 냉면 맛은 지금 중앙시장 먹자 골목의 가장 모서리에 있던 보통강이라는 분식집의 냉면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냉면을 먹으러 나섰는데, 아버지는 큰 형과 나를 그 먹자 골목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었다. 평소 거기에선 순대국과 튀김 만두, 김밥이나 먹어봤지 냉면은 시도해보지 않았었다. 당연한 것이, 나는 시장에서 파는 분식집 냉면에는 별 취미를 갖지 않았던 때문이다. 고추가루 양념과 참기름, 참깨가 수두룩히 들어가고 면은 고무줄 같은 시장냉면을 생각하고 각오하고 있었는데 나온 냉면은 순메밀과 최고의 육수로 만든 냉면이었다.
아버지와 같은 평양 출신의 영감님이 하시던 곳이었다.
후에 자리를 옮겨 지금 유림호텔 근처 버스정류장에 크게 간판을 내셨다. 하지만 영감님이 돌아가시고 맛을 제대로 내지 못한 것 같았다. 지금은 다른 식당으로 간판이 바뀌었다. 정말 아쉽다. 그 냉면 맛을 다시 볼 수 없다니. 오호, 애재, 통재라.
동두천에서 가장 유명한 냉면집은 아마도 평남면옥일 것이다.
오래됐고 맛도 좋았다. 육수와 동치미 국물을 잘 섞었는지 국물도 상큼 시원하다. 때로 꿩고기가 다져져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면에 전분이 너무 많이 들어간 느낌이다. 순 메밀 냉면은 일반 냉면보다 천 원 더 비싼데, 전에 들러서 순 메밀 냉면을 주문했더니 그 날만 그런 것인지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집은 그래도 여전히 동두천 냉면의 종가다. 전에 서울 사는 후배와 더운 여름날 등산을 하고 내려와서 이 집에 냉면을 먹으려고 들렀는데, 시원한 육수를 내와서 너무나 시원하게 잘 들이킨 기억이 있다. 이 댁의 수육과 무침도 빼놓을 수 없는 별미다.
동두천은 아니지만 송추의 평양냉면집과 의정부 병무청 근처의 냉면집도 내 단골이다. 또 연천군 군남에서 임진강을 건너 오른편으로 한 마장 정도 가면 나오는 황해냉면이란 집이 있는데, 이 집의 냉면도 일품이다. 특히 구수한 면수가 내 입맛에 맞고 황해도식 김치도 맛있는 집이다.
냉면은 아니지만 막국수 집도 들어보자.
턱거리 올라가는 고갯길의 초입에 상우아파트 못 미처 코리아스파라는 찜질방이 있는데 그 근처에 있는 초계탕 집이 내 단골이다.
면수도 잘 내고 있고 메밀전과 시원한 물김치(냉면대접에 흠씬 퍼 준다.)가 맛있다.
이 집은 닭으로 육수를 낸다. 토종닭을 잘 삶아 육수를 내고 여기 이런 저런 것들을 넣어 육수를 내는데, 그 감칠맛이 이를 데 없이 좋다.
막국수란 아마도 메밀의 도정 정도와 가루 입자의 굵기가 일반 냉면보다 더 거칠고 국물도 신경을 덜 쓴 까닭에 막국수라 하는 것 같은데, 이 집의 막국수는 오히려 냉면 명가라 하는 집들에 비해 못할 것 없다.
이 집은 옥호 그대로 초계탕이 일품이다. 육수를 낸 후 닭 살을 발라내어 찢고 사과, 양배추 등을 잘 썰어 넣어 사과즙과 식초가 상큼한 맛을 내는 육수에 말아 주고 다 먹은 후엔 막국수를 말아준다. 전에 외가 친척 누님들이 미국서 오신 길에 한국 와서 삼겹살이니 묵지근한 음식만 드신 것 같아 이 집으로 모셔서 초계탕을 대접해 드렸더니 아주 맛있게 잘 드셨다. 돌아가신 큰 어머니도 이 집의 물김치와 막국수를 좋아하셨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이 집에 가셔서 한 그릇 막국수를 뚝딱 해치우는 것을 좋아하셔서 자주 모시고 간다. 일단 면수와 메밀전, 물김치로 에피타이저를 삼고 있노라면 자연 소주 생각이 난다. 소주 한 병을 시키면 안주 삼으라고 닭살을 조금 찢어 주거나 닭날개 삶은 것을 내 주는데, 그게 그렇게 맛난 안주거리이다. 그리고 푸짐하게 막국수가 나오는데, 막국수 위에는 매운 고명과 닭살, 김치가 얹혀있다. 붉은 색 매운 고명과 흰 닭살, 그리고 푸른 색 배추김치가 이탈리아의 국기를 연상케 한다. 내가 가면 알아서 매운 고명은 빼고 주는 심지도 고맙다.
이 초계탕은 법원리 초리골의 초계탕이 원조라 하고 신천교 건너서 바로 보이는 초계탕집과 이 집이 그 법통을 이었다고 하는데, 원조보다 더 맛있게 느껴진다.
내가 혹평하는 소위 시장냉면도 그럴듯하게 내는 집이 있다. 동두천정보산업고등학교 앞에 있는 삼삼분식이다. 이 집은 시장냉면도 깔끔하게 맛 볼 수 있구나 하는 느낌을 준다. 시장냉면의 전형을 보여주고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평양냉면의 전통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냉면이지만 그래도 가끔 먹으면 별미가 될 것이다.
설렁탕과 더불어 냉면은 그 육수를 만들어내기가 가장 어려운 음식이다.
재료와 조리 과정이 모두 까다롭다. 때문에 설렁탕과 냉면 육수를 잘 마스터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모든 요리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봐도 된다.
그러나 설렁탕과 냉면은 수 많은 짝퉁과 이단, 이미테이션의 범람으로 맛을 잃어가고 있고 옛 맛집들이 하나 둘 사라져가고 있다. 두 음식은 강렬하지 않다.
특히 냉면은 이미 말한 대로 그 슴슴하고 밋밋한 맛을 살리기 위해 각고의 정성을 기울이는 비효율적인 음식이다. 그 만큼 정성을 기울였으면 기름지고 입에 꽉 차는 맛의 폭풍을 줘야 하는데, 냉면은 오히려 있는 맛부터 빼고 무덤덤한 맛을 내기 위해 시간을 잡는다. 그러나 냉면, 평양 냉면이 주는 그 허허로운 맛은 감히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음식의 신선, 음식의 도사급이라고 해야 하나? 평양 냉면은 정말 그런 면에서 독특한 음식이다. 이런 음식을 즐긴 선인들의 안목과 풍류가 새삼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전국의 냉면집을 다니다 보면 이북출신 영감님들을 볼 수가 있다. 혼자 오시던지 같이 오시던지. 억센 이북 억양으로 무뚝뚝하게 대화를 나누시던지 아니면 화난 표정으로 그냥 냉면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가신다. 이제는 그런 분들도 많이 가셨다. 갈 수 없는 휴전선 너머 고향을 향한 절실한 노스탤지어를 무덤덤한 냉면으로 달래고 계시던 분들이 하나 둘 세상을 뜬다. 우리 큰 아버지 두 분, 큰 어머니, 암으로 돌아가신 사촌 형님, 호탕하게 웃으시던 아버지의 벗들 (삼춘이라 부르던 분들), 그리고 을지로 가의 냉면집에서 자주 뵙던 영감님들, 명동 달러상 할머니…
이래 저래 맛으로 격으로 그리고 세월의 무상함으로 냉면은 뭔가 모를 모호한 감정의 결정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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