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감만유 5-소요산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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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수구
댓글 0건 조회 3,085회 작성일 09-10-22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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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요산은 일단 물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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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달콤 쌉쌀한 약수 맛은 물론이고 세수를 하거나 멱을 감아도 피부가 좋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금은 계곡 바로 옆에 길이 나있지만 예전에는 길에서 수풀을 헤치고서야 계류를 볼 수 있는 곳이 많았다. 나이 드신 분들이 일쑤 멱을 감기도 하고 탁족을 하기도 하셨다. 또 지금 주차장이 있는 곳과 차도 사이에는 풀이 많이 자라고 있던 그야말로 수풀이었고 지금의 약수터와 화장실, 매점이 있는 곳으로 물길이 굽이쳐서 흐르고 있어서 부녀자들이 멱을 감거나 빨래를 하기도 했다. 물이 좋아서 때가 쉬 빠지고 빨래건 사람 살이건 부드러워진다고 했다.


 

 나도 소요산 물의 효능을 경험한 적이 있다.


 대학교 1학년 때다.


 방학을 하고 얼마 안 돼서 친우 둘과 같이 자재암 뒷편에서 캠핑을 했다. 지금은 캠핑과 취사가 금지됐지만 그때는 자유로웠다. 저녁을 먹고 컴컴해진 무렵에 바로 위에 있는 선녀탕으로 갔다.


 

제 1 목적은 선녀생포.


제 2 목적은 선녀탕에서 멱을 감는다는 흔쾌함이었다.


선녀탕으로 가는 길은 예닐곱 길이 넘는 절벽을 타고 오르는 길이었고 두 세 군데 패인 소()가 있었다. 여기서 낄낄대며 셋이 야밤에 멱을 감았다. 가슴 속까지 시원했다. 그리고는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서늘하기까지 한 산 속의 여름 밤을 즐기며 잤다. 정말 피서였다. 제 2 목적은 일단 이룬 셈이다. 제 1 목적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목적과 목표는 구체적이라야 하는데 생포할 대상의 모호함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다음날 애초 기대하지 않았던 효과가 발생했다.


 


 다음날 일어난 나는 깜짝 놀랐다. 아직 어린 나이라서 내 등에는 여드름 비슷한 피부트러블이 있었는데 이것들이 모조리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놀라운 치유력이었다. 아마도 산에서 보낸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좋은 공기를 마시고 좋은 물을 마시고 풍욕을 하고 좋은 물에 목욕을 하고 푹 잠잤던 것이 주효한 모양이었다. 이 아니 좋을시고.


 지금도 몸이 가렵고 생각지도 않은 붉은 것이 생기는 여름 무렵이면 선녀탕에서 달밤에 멱을 감고 싶은 생각 간절하나 공원내에서 캠핑이 금지되는 등 통제가 심해졌다. 소시적의 생각을 하면 그깟 통제망이야 못 뚫을 것도 없지만 이미 선녀를 잡겠다는 당시의 치기가 사라진 연배에 통제망을 뚫고 피부미인이 되겠다는 행동력은 이미 내게서 사라진 지 오래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치기가 사라진다는 것. 그 치기란 곧 에너지라 할 수 있다. 난 그 에너지가 과잉했던지 치기 어린 행동을 줄창 해대고 다녔다.


 


 여기 소요산에 지난 겨울 후배들과 같이 가볍게 오른 적이 있었다.


 눈 쌓인 산에 오르면서 아이젠이니 하켄 같은 것들은 준비하지도 않았다. 오르다가 산길이 좀 착잡하다 싶으면 곧바로 막걸리나 홉들이로 마시고 오려는 생각에.


 나는 이런 산행을 겁 많은 주당의 산행이라 칭한다. 매점에서 막걸리 두 병과 번데기를 샀다. 삽상한 바람이 밤새 내린 눈 위에서 불어대는 것이 춥다기 보다는 시원했다. 귓볼이 언 채로 차가운 막걸리를 들이켰다. 폭포를 지나 올라가면 공주본과 자재암 방향으로 갈라지는 길이 나오는데, 우리는 공주봉 방향으로 올라갔고 너른한 바위에 쌓인 눈을 털고 막걸리를 들이켰다. 아니 들이켠다기 보다는 스포이드로 떠서 살살 입에 넣는 형국이었다. 아무리 낮게 오르고 짧게 지낸다 해도 산은 산이라 술을 조금만 사 가자는 내 고집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껴 마시던 막걸리는 마치 프랑스산 꼬냑처럼 귀히 여겨졌다. 번데기는 캐비어 취급을 받았다. 지금도 그 막걸리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겨울에 한국에 가면 반드시 막걸리 두어 병을 사 들고 그 동생들과 소요산에 가야지.


 


 소요산 입구의 식당가에는 여러 식당들이 늘어서서 산행객들을 반기고 있다.


 나는 그 중 금수강산이라는 식당을 주로 찾았다.


 혼자서 산행하는 때는 산나물 비빔빕이나 해장국, 비 오는 날에는 막걸리에 녹두 빈대떡을 곁들였다. 저녁 무렵 술 친구하는 동생들과 갈 때면 백숙이나 매운탕, 그리고 겨울이면 빙어도 찾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주인이 바뀌어서 찾아가지질 않는다. 오랜만에 들른 곳에 맞아주는 주인이 없으니 몹시 서운했다. 그래 바뀐 주인의 음식 솜씨도 예사롭지 않고 친절하기도 했지만 다시 찾지 않는다. 음식이란 단순히 맛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사람의 향기가 나야 하는 것인가 보다. 그래도 여기 있는 식당들에서 내는 음식들은 모두 먹을 만하다. 특히 잡어 매운탕이나 도토리 묵, 산나물 등은 나름대로 풍미가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딱히 소요산을 대표하는 음식이라고 들 만한 것이 없다. 머리 싸매고 생각해 볼 일이다. 그 곳에 가면 그 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먹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소요산은 아직 그 점에서는 부족하다. 혹자는 도토리 묵을 들기도 하는데, 내 생각으로는 그건 소요산에서 딴 도토리로 만든 것이 아닌 성 싶다. 그 정도 도토리가 나오려면 도토리 익는 철에는 도토리 따는 이들이 분주히 움직일 만도 한데 본 기억이 없다. 내 시야가 좁은 것일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좋은 먹거리는 상품화 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걸 먹으면 중죄인 취급을 당하는 메뉴이고 이 먹거리의 생성과정은 극히 흉악하다.


 


 평소 자재암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도 불심은 전혀 생기지 않은 덜 돼먹은 중생인지라 세심교라는 조그만 돌다리를 건너면서 아래 계곡물을 볼 때마다 궁금한 것이 그 얕고 차가운 돌 틈 시내에서 헤엄치는 제법 손가락 굵기만한 물고기들이었다. 저 놈들은 무슨 맛이 날까? 저 놈들은 오염이 덜 됐겠지? 라는 저급한 생각이 들곤 했다. 그리고 드디어 행동을 개시했다.


 평소 이런 범죄 비슷한 (아니, 이건 범죄 그 자체로구나) 일들을 벌릴 때마다 공범으로 엮었던 후배 하나와 아직 철 모르는 방년 21세의 여인을 지목하여 불렀다.저녁 소요산엘 가 보자고.


 후배는 이 형이란 인간이 뭔가 흐뭇하지 못한 일을 획책하고 있다.. 라는  심증을 굳힌 채 따라왔고 이 아가씨는 마침 심심했던지 할랑할랑 가벼운 차림으로 내 차에 동승했다. 나중 경험담으로 내가 꾸린 배낭이 좀 무거운 것을 보고는 후배는 내가 소요산에서 금광이라도 개발할 것 같았단다.


 어두워져 가는 폭포 뒷쪽 세심교 다리 근처는 사람이 드나들지 않았다. 가끔 드나드는 스님들의 주의를 분산시키느라 나는 그 아가씨를 옆에 앉히고는 데이트 중인 양 했다. 하긴 나도 물론 흑심은 있었고. 이야말로 일거 양득이 아닌가? 후배는 계단 윗쪽 상행길과 하행길을 감제할 수 있는 고지에 배치하여 망을 보게 했다. 즉석에서 페트병을 이용하여 만든 어항을 두고 랜턴을 비춰 보통 뜰채 어망보다 1/4크기로 개조한 범죄전문어로형 어망으로 부지런히 고기를 잡았다. 그리고 옆의 아가씨에게는 즉석에서 견지 사용법을 가르쳐 주고 고기를 낚게 했다.


 


 그런데 이 아가씨 조상이 베드로와 안드레였는지 닭 생간을 미끼 삼아 실을 내리면 족족 걷어 올리는 것이다. 닭 생간과 고추장, 새우 가루를 적당히 버무린 급조 어항 속의 미끼도 향기로운 역할을 다하였고 한 손으로도 뜰 수 있도록 개조한 뜰채도 고안자의 심려를 깨끗이 날리며 선전하였다.


 망을 보던 후배는 사방 50미터 이내 접근한 적군의 출현을 뛰어난 시각과 청각으로 포착했다. 일단 인체의 접근이 포착되면 일정한 신호를 보낸다. 그러면 뜰채와 견지를 내던지고 서른 여섯의 중년과 스물하나의 아가씨가 손을 잡고는 물가에 앉아 있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아가씨, 공범자로는 으뜸이다. 내 생애 갖은 개구쟁이 짓을 했어도 이렇게 손발 척척 맞는 파트너는 본 적이 없는지라 그 청순한 얼굴 속 숨어 있던 장난기는 세상 어느 황소 도적과도 능히 겨룰 만 했다.


 이렇게 잡힌 고기가 가히 4~50여 수나 됐다.


 가히 씨를 말렸다.


 


 이미 늦은 저녁인지라 아래쪽 정자로 급히 내려왔다.


 


 내 차에는 수렵어로채취와 취사가 가능하도록 별의 별 것들이 항시 준비돼 있었다.


 


 그 목록을 볼 작시면...


 1. 소금, 마늘가루, 허브 가루, 고춧가루, 고추장, 된장, 밀가루 등이 밀봉돼있고


 2. 불판과 가스레인지, 숯, 쏘시개감 신문지 등


 3. 버터, 올리브 기름, 고추 기름


 4. 일회용 접시, 수저와 쿠킹 호일, 면장갑 


 5. 도마, 칼(중국식의 볼이 넓은 놈. 이걸로 회도 뜨고 생선도 다듬고 닭뼈나 돼지 갈비도 토막낼 수 있다.), 가위, 집게, 코펠, 국자 등 조리기구


 6. 소주, 라면


등등이 완비돼 있었다. 이것들이 언제나 내 차의 트렁크를 바짝 차지하고 있는 덕에 언제나 어머니의 지청구를 듣기도 했다.


 아무튼,이것들을 척척 꺼내서 즉석 요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는데, 먼저 술안주가 필요했다.


 밀가루를 물에 개서 약간의 소금 간을 하고 밀가루가 어느 정도 호화되는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잡은 고기들의 밸을 탔다. 이 당시는 칼도 필요 없이 손가락 만으로도 밸을 타는 솜씨가 발달한 지라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산메기로 짐작되는 녀석들은 비늘을 털 필요가 없어 더욱 좋았다. 그리고 밀가루 입히고 반죽을 씌워 튀기기 시작하고 불을 피워 코펠을 걸고 미리 준비해 간 무우를 썰어서 국물을 우려냈다. 튀김을 살살 즐기며 소주를 한 잔 먼저 했다. 그 맛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물고기에서 수박 향이 났다.


 무우 국물이 다 끓어서 거품을 내는 소리가 들리는지라 이내 호박과 감자 등속을 썰어 넣고 물고기를 마저 쓸어 넣고 고추가루와 고추장 양념을 하고 소주 한 잔을 넣어 팔팔 끓였다. 마지막으러 양파와 대파를 미리 썰어간 것을 넣어 불을 줄이고는 조금 기다렸다가 국물을 입에 담았다.


 "죽여준다."


 처음부터 공범자의 처지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받아들였던 후배가 적극적 공범으로 돌아섰다. 우리는 국물에 밀가루 반죽과 라면을 더 넣어 불과 1시간 전 계곡 속에서 신선처럼 헤엄치던 물고기들을 일말의 죄책감 없이 먹어댔다.


 이 아가씨, 한 마디 더.


 "우리 다음에 또 와욧!"


 


 아흐, 나는 이후로 이 공범자들과 가슴 떨리는 야간의 환경파괴를 두 차례나 해야 했다. 이후로는 종범들이 주범보다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범행의 수법과 내용도 점차 계획적, 조직적으로 변모하였고 대담해졌다. 아마 이 범죄행각이 계속됐으면 우리는 은행도 제대로 털었을 것이다. 공소시효는 지났을 것이라 털어놓지만 아무래도 할 짓은 못되고 지금사 생각하면 제대로 환경파괴를 했구나 싶다.


 하지만 그 맛의 기억이란 것이 고약하게도 죄책감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다음에 소요산에 가면 다시 그 자리에 서서 그 고기들의 후손들에게 맛난 깻묵이라도 대접하고 싶다.


 


 어느 유명한 문장으로 "그대 그 곳에 다시 가지 못하리..."라는 귀절이 있는데, 나는 다시 그 개구장이 짓을 할 수 있을지? 친구들과 같이 선녀탕이 아니라도 어느 계류에 멱 감고 이를 부딪칠 수 있을지? 육자배기 가락 같은 욕지거리로 나를 맞아주는 밥집을 그 때 보다 더 많이 만들 수 있을지? 내가 가자고 하면 말도 안되는 겨울산행이나 도립공원 속 생물의 씨말리기에 동참하여 열악한 환경에서 즐겁게 술 한 잔 털어 넣으며 취담진담을 나눌 동무들이 아직 기다리고 있을까?


 내가 앞으로 즐길 산은. 내가 앞으로 더불을 인간들은 나의 사람 그릇에 맞춰질 것이다. 그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인격의 부족함을 메우고 포용의 부족함을 달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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