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담만유 4. 소요산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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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에 사는 이 치고 소요산 한 번 안 밟아본 이 없다.
하지만 소요산을 잘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동두천에 있는 학교의 모든 교가가 이 산을 언급하고 있고 학교 소풍의 단골 마당이 바로 이 산이다.
동두천의 북북동에서 동두천을 굽어 보고 있으면서 서쪽으로는 신천을 격하고 마차산을 마주하고 있고 동쪽과 동남으로 국사봉과 왕방산을 두고 바라본다. 산정에 서면 북쪽의 종현산과 마차산 너머 감악산이 보이고 한탄강 건너 전곡을 감제할 수 있다. 그 중간에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고 신라까지 먹으려 들던 당나라에 대응하여 신라가 국력을 기울여 전투를 벌인 매초성이 있다. 교통의 요지는 아니지만 군사상의 요충이다.
동두천에 사는 이들은 소요산의 측면만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계곡으로 진입하는 입구가 동두천 시가지에서 보이지 않고 미군부대가 시가지와 소요산의 경계에 있고 또 안창말의 뒷쪽이나 원각사쪽에서 진입하기에는 너무 험하다. 또 산의 비경이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고 골짜기에서 산의 내부를 볼 때 잘 드러나기 때문에 그냥 동두천에서 보자면 아기자기한 맛이 없는 산이다.
그러나 소요산 역에서 내려 즐비한 상가 등을 지나 호리병 입구 처럼 좁은 지대를 지나 주차장에서부터는 제법 수목이 바람에 비벼지는 소리가 나고 오붓한 골짜기에 졸졸 흐르는 계류가 즐겁다.
소요산은 습곡산지의 지형이 동에서 서로 힘을 주다가 추가령 구조대의 억센 용암대와 만나 심하게 구부러지고 그 서슬에 굳센 바위산에 균열이 일어 그 드라마틱한 창조적 파괴가 진행된 형국이다. 골짜기의 암석들은 굳고 단단하여 쪼개질지라도 좀처럼 잘게 부서지지 않는 규암질이 주성분인데, 그 때문에 바위 위로 물이 제법 흐르다가도 쌓인 돌 틈으로 사라지거나 암반의 밑을 흐르거나 아니면 아예 두 세 겹 지층의 밑을 통과하다가 불쑥불쑥 솟아나기에 수량이 그리 많지는 않다.
그러나 그런 때문에 돌 틈에서 자연 정화된 약수가 곳곳에 있고 또 흐르는 물을 그냥 받아 마셔도 물 맛이 좋다. 아마 이 산의 암석에 풍부한 미네랄이 원인인 듯 싶다.
또 이런 지형 때문에 그리 높지 않지만 풍치가 오밀조밀하고 한편 장쾌한 맛이 있기도 하고 짧지만 가파른 등산로로 악명이 높다.
소요산을 아는 시민들은 네 등급으로 분류된다.
4 등급은 최하층으로서 소요산 입구의 파전 집에서 막걸리 좋이 흘리고 가신 분들이다. 주로 가을철에 이 분들의 인구밀도가 높다.
3 등급은 나름 풍류가 있으셔서 소요산 광장이나 계곡에서 학창 시절 껌 좀 씹으시고 담배 깨나 피우셨다가 어른이 되셔서 다시 찾아 자재암에도 오르시고 가족들과 함께 계곡에 발 담그고 닭백숙 드시며 가족애를 고양시키는 동시에 과거의 회상을 즐기시는 분들로서 금의환향한 케이스이다. 주로 여름철에 오시면 생연동, 송내동 사시는 이 분들이 여기서 자주 목격된다.
2 등급은 1 년에 두어번 정상에도 오르시고 새해의 첫 아침을 공주봉에서 맞이하시기도 하시는 그런 분들이다.
1 등급은 소요산을 할랑할랑 찾아오면서 어느 날은 내친 김에 의상대에 오르시기도 하시고 어느 날은 자재암에서 땀을 들이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아예 입구의 주점에서 도토리묵에 반주 한 잔 들이키며 잠시 해탈의 경지를 누리시기도 하는 도인적 풍모를 보이는 분들이다. 소요산 이름이 아예 소요자재 유유자적의 그 소요이니 거닐고 흔들거리는 즐거움을 이 산에서 누리니 그 이름에 딱 부합한다. 애초 정상 정복이나 동창모임의 목적론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소요산이라는 산 자체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가치에 중점을 둔다. 소요산이 있기에 인생이 즐거운 분들이다.
이런 분들은 도민증 필수 지참이 헌법적 행동강령이다. 도민증이 있어야 입구에서 민증 까고 프리패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항상 삐딱한 시선을 견지하고 있는 나로서는 먼저 소요산을 소요산답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을 꼽는다.
가장 못마땅한 것은 소요산에 즐비한 인위의 화강암 석축물이다.
그 석축물들은 학창시절 특히 유월의 추억과 맞닥뜨린다.
김영랑의 시에 나오는 모란꽃 피는 찬란한 슬픔의 봄 음력 오월인 양력 유월이 아니다.
현충일이 있는 유월, 한국전쟁 발발일인 6.25가 있는 그 유월이다.
그 유월이면 소요산은 가히 엄숙한 반공정신의 성지가 된다.
호국영령들을 다투어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
소요산 주차장의 목적과 이름 모를 비각과 또 국적불명의 유니콘 입상이 서 있는 추도비, 벨기에 룩셈부르크 용사(이럴 때는 '용사'라고 표현해야 한다) 참전비, 그리고 동두천 시 역사상 최고의 전시행정 및 예산낭비가 구시대적 사고와 어울려 탄생한 저 쓸모 없는 흉물 자유수호평화박물관 (이 이름이 맞나? 하도 좋은 것들을 갖다 붙여 놓으셔서.... )이 소요산의 옆구리를 들쑤시고 자리잡았다.
일단 눈에 잘 보이는 곳이나 명승지에 즐비한 종교적 반공국가의 사당들.
동두천은 소요산 말고도 다른 곳에 있는 유사 기념물들까지 합쳐 수효로도 단위 면적당 국내 최고일 것이다.
그 유월이면 온갖 애국심을 고양하는 글짓기 대회가 열리고 갖가지 행사가 열려 학생들은 덕분에 수업을 빼먹고 인원을 할당 받은 각 학교의 주임들은 골머리를 앓는다.
이 추모행사가 열리면 그야말로 지역의 반공열사들은 일제 집합하신다.
반공열사는 아니라 하더라도 시장님은 필참이요 왼쪽 가슴팍의 붉은 코사쥬(원가 800원)가 그 존재근거인 듯한 시의원 나리들, 관계 공무원들, 상이군경회, 참전용사회, 해병전우회 ( 그 섹시한 빨간색. 붉은 색이 아니라 빨간색이다.), 경우회, 재향군인회 (나 제대할 때 재향군인회비 내라고 해서 냈다. 제대 안 시켜줄까봐. 알고 보니 퇴역하신 장성들이 모여서 북 치고 장구 치고 꿩 먹고 알 먹고.... 일반 회원님들, 즉 병으로 제대하신 분들이여, 제발 여기서 회장으로 출마해 보시라.), 무슨 자유총연맹 (이런 이름은 전혀 자유스럽다는 생각이 안 든다.), 반공연맹 (반공연맹 회원들이라면 중국에 대해 무슨 테러라도 가해야 하는 거 아냐? 거기 아직도 명색이 공산국가인데. 윤봉길 의사가 홍코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 던지듯이 우리나라 반공연맹 회원들도 비밀 결사를 일으켜서 천안문에 김밥이라도 던지던지 아님 오줌이라도 갈기고 와라. 이승복이 부끄럽지 않나? 국민 상대로 아직도 북방의 최빈국이 전쟁 일으키면 우리 다 죽는다는 괴담 유포하지 말고.) 회원님들, 무슨 부녀회원들 (이 분들의 유니폼은 복장에 있지 않고 헤어 스타일에 있다. 앞 이마를 찢어지게 올린 뽀글 파마.), 그리고 JC, 라이온스, 로타리, PTP, 적십자 단체들. 요즘 틈틈이 보이는 새오른쪽(뉴라이트) 분들 (새로울 것은 없는데, "뉴"자를 갖다 붙이니 신선하긴 하다. 이 양반들 대부분이 예수쟁이들인데 한 손에 십자가, 한 손에 성조기 들고 집단적으로 우왕 떠시는 모습이 귀엽긴 한데 신종 공해 같아서 당최~ 같은 예수쟁이로서 면구스럽고 민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랴? 제 믿음대로 될찌어다. 아멘.), 그리고 이런 곳에 습관적으로 얼굴 비추시는 분들.... 이 분들은 가슴에 꽃도 없고 이렇다할 문패도 없다. 다만 무명용사라 참칭할 수 있으려나?
아이고 하여간 단체도 많아라....
복 있을찌라. 우리 동두천.
이처럼 국가와 민족과 지역을 위해 노고가 크신 분들이 많이 계시니 동두천의 급발전은 시간문제다. 정말 문제다.
이런 분들이 만족스럽든 아니든 서열 순으로 아님 짬밥 순으로 앞에 앉으시고 그 옆엔 군악대 혹은 우리 이쁜 동두천 정보산업고 관악대 학생들이 행사지원 나왔다.
유월이 되면 어김 없이 보이는 이 풍경...
위에 언급한 분들 중에 정말 나라를 위한 추모의 념을 간직하고 계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 추모의 형태가 모습을 달리하였으면 한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직선거리로 가면 2주일이면 도달할 수 있는 가나안 땅에 40여년이 지나서야 들어갔다. 하나님은 노예의 습성에 찌들어 있는 구세대보다는 광야에서 새롭게 태어난 세대들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다.
광복 63년이 지나고 한국전쟁이 끝난 지 55년이 지났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노예적 컴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강요된 이념의 노예가 된 것은 아닐까?
아마 일제 시대 친일적 행각을 한 이들이 이승만이라는 사이비 교주 같은 소위 "국부"를 만난 덕에 다시 득세하고 좌익사냥을 하면서 그 세력을 키우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 공포심으로 국민들을 다스리면서 박정희 시대 그 서슬 퍼런 유신의 시대에 국민들에게 총칼 앞의 총화단결을 강요하면서 자신들은 엘리트 공무원과 자본가로 다시 거듭나면서 국민에게는 빈곤에서의 탈피를 내세우고 정신적 거지로 변모하게끔한 그 왜곡된 역사의 와중에서 제국주의적 형식주의에 유사종교 같은 이념의 강요,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 헐뜯으며 무자비하게 다른 사상을 뿌리뽑던 과거가 이런 형태로 변태되어 나타나는 것 같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와 한국전쟁의 와중에 돌아가신 분들이 원하는 조국은 이런 군사문화적 잔재가 있는 조국이 아니었을 것이며, 이런 이념의 강요와 추모의 강요가 있는 나라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역사를 냉철하게 바라보도록 교육 받은 이성적인 학생들이 순수하고 뜨거운 심장으로 이 분들에게 들풀 한송이를 꺾어 올리는 진정한 추모를 원한다. 그런 나라가 올 때 비로소 한국은 선진국이 될 것이다.
진정한 선진국은 싱가포르 같은 나라가 아니다. 잘 사는 굴종자들이 있는 나라가 아니다. 돈의 노예가 된 백성들의 나라가 아니다. 돈을 잘 버는 사람들이 아니고 돈을 지혜롭게 쓸 줄 아는 사람들의 나라이다. 정의의 노예가 되고 인간적 삶을 요구하는 국민과 그 국민들의 의견을 지혜롭게 받아들여 정책에 반영하는 정치인들이 있는 서구 유럽의 몇몇 국가들 같은 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일 것이다.
경제적으로 힘들다고 무조건 돈 잘 벌고 땅 잘파고 노동자들 죽도록 일 시키던 공사판 깡다구 있는 사장을 대통령으로 뽑는 국민.... 그 댓가는 지금 국민에게 오고 있다.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얘기가 너무 딴 데로 흘렀다.
아무튼 소요산을 소요산스럽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먼저 소요산에는 없는 건축자재인 화강암으로 만든 몇몇 국가종교의 새로운 신사참배의 현장이다.
또 다른 것으로는 자재암에서 걷는 입산요금이다.
이 입산 요금은 주차비와 별도로 내고 있다. 그나마 동두천 시민들에게는 무료개방이지만 다른 지역 주민들에게는 에누리 없다. 마치 동두천 시민들에게 돈 못 받는 사실에 대해 화풀이라도 하듯이. 그 명목이 웃긴다. 문화재 관람료란다.
난 자재암을 수 없이 지나다니면서 이 문화재 한 번도 못 봤다.
보여달라면 보여주려나? 그럼 돈 더 받을까? 문화재 근거리 관람료로. 차라리 화끈하게 그냥 시주님들 돈 내고 들어와야 우리도 먹고 살겠다고 하지. 내 아무리 나이롱스런 예수쟁이지만 평소 스님들께 시주도 하고 절집 밥도 잘 먹고 하는 편인데.
이런 코메디야말로 진짜 시대적 문화재 감이다. 이런 행태를 사진으로 찍고 비디오로 남기고 문화재 보존하시느라 애쓰시는 스님들 명단을 판각으로 떠서 무형문화재, 인간문화재, 기록문화재로 지정, 길이 후손들에게 남길 만하다.
또 다른 것은 계곡을 점유하여 자릿세를 받는 상인들이다.
대한민국 어디서든지 이런 유원지의 불법점유가 행락철이면 기승을 부리는데, 앞으로 이런 유원지 계곡의 자릿세를 받는 상점들은 그 계곡에 대한 사적 점유를 뒷받침하는 등기문서라도 좀 걸었으면 좋겠다. 하긴 이런 것은 생존적 차원이고 소요산을 지키는 주민들의 여름 한 철 장사이니 그래도 봐줄만하다.
아까 소요산을 찾는 분들에게 내신 성적을 매겼었는데, 나는 몇 등급일까? 나는 본의 아니게 1등급이 됐다.
나는 10년 전 사업에 실패했다.
사업의 실패는 사업만의 실패가 아니란 걸 처절히 느꼈다.
온 세상이 나에게 등을 돌린 것 같았다. 유달랐던 내 자존심은 날아갔다. 내 몸은 짙어진 병색으로 죽음을 엿보아야만 했고 내 정신도 괴로움으로 인해 죽음의 도구들을 물색하던 때였다. 연인을 떠나 보내야 했다.
나는 영락했다. 영락은 곧 타락으로 가는 것. 나는 영락이 타락으로 가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나는 살아내야 했다.
그 방안 중 하나가 산이었다.
그리고 달리 뽀족한 수도 없었다.
내 곁에는 막내 아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어머님과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으시는 아버님과 그리고 나에게 전적인 신뢰를 보내는 코카스파니엘 종 베니라고 이름 붙인 강아지였다.
나는 베니를 데리고 날마다 창말서 소요산을 거닐었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근육의 움직임이 아니라 진정한 사색의 시작이라는 것은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집에서 빠른 걸음으로 자재암까지 갔다 오자면 두어시간 남짓 걸렸다. 나는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이육사의 시를 외우기도 하고 오페라의 곡조를 외우기도 했다. 대학 시절 나를 골치 아프게 했던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과 예레미야 애가의 구절을 외우기도 했다. 나보다 더 비참했던 그러나 위대했던 사람들의 영혼을 불러 대화했다. 베토벤을 불렀다. 슈베르트를 불렀다. 이순신을 불러냈다. 고흐를 불러냈다.
그들이 물러갈 즈음이면 나는 어느 새 자재암의 석굴에 와 있었다.
거기서 마시는 약수의 맛은 정말 온갖 진수성찬보다 화려했다. 나는 소요산의 1 등급 객이 되어가고 있었다.
세 끼 밥을 위해 전곡의 학원에 들어가서 영어와 국사, 국어를 가르쳤다. 학원의 출근시간은 다른 직장과 달라 오전에는 시간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수업 중에 열강하고 나면 찾아오는 휑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단골 포장마차를 찾았고 그리고 취해 잠들었다. 그러나 아침이면 취기가 덜 가셨어도 산에 올랐다. 그리고 주린 양 그 시원하고 알싸한 약수를 들이켰다.
베니가 죽었다.
나는 그를 몹시 우뢰 치고 비가오던 사월에 안창말 뒷쪽 소요산 기슭에 묻었다. 벚꽃과 복숭아 꽃이 천지로 피었고 낭자하게 지던 봄이었다. 일요일이었다. 처음으로 교회 예배를 위한 성가대 연습에 늦은 날이었다. 그날 오후에 베니를 묻었다. 나는 울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산에 올랐다. 오를 채비를 하며 습관처럼 베니를 묶을 나들이용 끈을 들고 현관을 나섰다가 다시 울었다. 서른이 넘은 장정이 개가 죽었다고 울었다. 그러나 그는 개가 아니라 산동무였고 내 반려였다.
그렇게 산을 다니면서 이제 혼자 물 마시는 약수터에도 익숙해졌다. 나는 슬그머니 건강을 회복했고 자신감을 다져가기 시작했다. 산의 공기와 골짜기의 물이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다시 재기의 칼을 벼리고 새로운 사업을 기획해가던 때 내 친한 벗이 나와 길동무를 하게 됐다.
영화제작을 하다가 이리저리 막혔다고 한다. 영화만을 하던 이에게 사회는 냉혹했다. 더구나 그는 아내가 있고 어린 아들이 있고 또 갓난 딸이 막 생긴 무렵이었다. 그 해 겨울은 몹시나 추웠다. 그러나 내 벗의 마음은 더 추웠고 힘들게 눈보라 치던 백운대를 오르며 우리는 산행의 고통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실패가 주는 참담함과 싸웠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땀이 났다. 땀이 식으면 더 추웠다.
코 끝에선 서리가 익어도 입 안은 몹시 갈했다. 하산길에 차가운 약수를 들이켰다.
우리는 무언가에 목 말라있었다.
생이 주는 정신적, 경제적 갈급함에 약수가 주는 물리적 효능은 비단 시원함 뿐이 아니었다.
지금 그는 일용할 양식을 걱정치 않고 아내와 자식들을 잘 거느리고 살고 있고 나 또한 실패와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 재기했다.
지금도 가끔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한다. 그 해 추운 겨울과 더 추웠던 마음의 황량함을. 그리고 그 몸부림과도 같던 산행에서 자네가 있어서 좋았고 마음의 모서리를 다질 수 있었다고. 그리고 차가운 약수물을 언제 같이 마시자고.
지금 나는 멀리 말레이시아에 있다.
하지만 소요산을 꿈에 본다.
그 길에서 마주친 동네 분들을 본다.
내 발에 부딪치듯 스치면서 즐겁게 달리던 베니의 곱슬한 털을 본다.
처음 산행에 따라와 몹시 땀 흘리던 처연한 표정의 벗이 생각난다.
양복을 입고 문을 나서던 아들이 허름한 입성으로 물통이 가득 든 배낭을 지고 나가는 모습을 안쓰럽게 보던 어머님의 눈빛을 본다.
땀에 젖어 물통을 채워 돌아오면 호탕하게 웃으시며 맞아주시던 아버님을 본다. 그 날 따라 왠지 아버님의 큰 웃음 소리는 속이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람 불던 초여름 숲을 빗듯이 지나던 바람소리를 듣는다.
쇠잔한 몸으로 영락하여 연락을 끊고 칩거하던 불초한 나를 보려고 수업을 빠지고 혹시나 내가 올까 소요산 주차장에 차를 대 놓고 기다리다 나를 발견하고도 차마 나서지 못해 차 안에서 울던 그녀를 본다.
나는 그녀가 있음을 알고도 그냥 못 본 듯이 그 차를 지나쳤다. 못 본 듯 지나쳤지만 그 광경은 아직도 선명하다. 차 안의 그녀는 얼굴을 깊이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지금 그녀를 안아주지 못하면 평생 안을 수 없을 것 같은 슬픈 예감에도 불구하고 지나쳤다. 슬픈 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 없었다. 슬프게도.
그 전날엔 무슨 일로 산엘 가지 못했는데 혹시 전날에도 와서 기다렸을까봐 마음 아팠다. 그녀가 마음 아픈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을텐데.
내 생일 다음날이었다.
나는 그 날 약수를 마실 수가 없었다. 골짜기 구석진 곳에 가서 울었다. 아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단풍도 다 지난 11월의 황량했던 소요산이었다.
소요산의 맛과 향기는 그 약수의 맛으로 먼저 다가온다.
쌉싸름하면서도 달고 시원한 자재암의 약수는 찻잎을 우려내어 먹으면 더욱 좋다. 또 주차장의 약수터의 물맛은 자재암의 물맛보다 더 착착 와서 감긴다. 깊은 맛은 덜하지만 더 감기는 맛이 있다. 이 물은 커피를 끓여 마시면 좋다.
커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자판기 커피는 여기 주차장 옆 매점의 자판기 커피가 최고다. 은은한 헤이즐넛 향기의 커피에 설탕과 분말크림의 배합이 적절하고 게다가 좋은 물을 썼다. 흐린 봄날, 꽃도 지고 비 한 줄기 후드득 후드득 떨어지던 어느 바람 불던 날 땀으로 몸을 적시고 약수로 속을 적시고 내려와 이 곳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의자에 앉아 건너편 산기슭에 우수수 부시시 불던 바람 소리 들으며 바람에 부대끼는 수목의 군무를 구경하던 장면이 기억난다. 한 잔의 커피와 한 줄기 바람이 이처럼 잘 어울릴 수도 있구나, 하며 커피를 음미하던 때도 있었다.
나무가 꽃 보다 더 아름답다고 느껴졌던 추억이다.
지금 소방서가 있는 자리 옆의 약수물도 한 30년 전에 그 위쪽에서 받을 때는 좋은 물로 호가 났었는데 요즘은 모르겠다. 또 골짜기 골짜기 돌 틈 돌 틈 나만 아는 비장의 장소에서 새록새록 솟아나던 샘들은 지금도 잘 있는지 모르겠다.
소요산의 맛과 향기는 약수뿐 아니라 그 바람에도 별스러운 것이 있다.
봄날 부대끼는 꽃들의 향기, 여름 밤 반딧불이 날개짓이 몽롱한 촉수의 조명으로 날고 짙은 풀냄새 자욱한 향기, 가을날 마른 잎의 향기, 대기도 수정처럼 얼어붙는 겨울 코끝이 찡한 눈 냄새, 얼음냄새, 얼음 밑에서 낙엽이 정갈한 흙으로 회귀하는 냄새.
한 번 쯤은 소요산으로 빈자의 산행을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산의 향기와 물 맛에 취하시라고. 아무 것도 드시지 말고 약수 맛만 보세요, 바람의 향에 심취해 보세요.혹 심심하시다면 스타벅스, 커피빈이 아니라도 세상서 가장 맛난 커피 한 잔 드시라고. 그리고 그냥 집으로 가세요. 천천히 느리게 즐거운 공복감을 느끼면서...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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