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담만유 2. 창말 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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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말이란 창리마을의 준말이다.
동두천 시내에서 소요산 쪽으로 가자면 동두천 역(원래 동두천 역이었다가 일개 어수동역에게 동두천 역의 명칭을 내준 뒤 이십 수 년 간 동안역, 즉 동두천리와 안흥리가 합쳐진 동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내다가 근래 전철이 개통됨과 동시에 과거의 이름을 찾았으니 광영이로다.)이 보인다. 그리고 더 가면 고개가 하나 보인다. 이름하여 창말고개. 여기서 왼쪽으로 아담한 동네가 나오는데 이 곳이 창말이다. 고개를 넘기 전 도로 오른쪽에 있는 동네는 안창말, 고개를 넘어서면 바깥창말이다.
바깥창말과 안창말을 구분하는 고개는 소요산의 서남쪽 모서리에 있는 작은 야산의 능선이 만들어놓은 곳인데 고갯마루는 미2사단의 공병대대가 점령하고 있다. 이 공병대대는 국도3호선을 사이에 두고 대대본부와 병영이 있는 동쪽과 수송차량이 있는 서쪽으로 구분된다. 이 수송대가 있는 서쪽언덕은 북쪽에 창말교회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능선은 서쪽의 경원선이 지나는 곳에서 급격하게 끝나고 멀리 신천과 신천 너머 안흥리, 그리고 지금의 동두천 시가까지 감제할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은 공장지대가 들어와서 보기만 해도 삼박사일치 입맛이 싹달아나지만 예전에 창말교회에서 서남쪽으로 논밭이 펼쳐진데다가 고졸한 모습의 안흥교회가 키 높은 나무 사이에 있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좋아보일 수가 없었다. 마치 반 고흐의 그림 속에 나오는 풍경과 같았다.
바깥창말의 옆구리를 가로질러 남북으로 경원선이 흐르고 그 아래 저지대로 습윤한 논밭이 있었다. 그리고 옛날에는 강변에 토마토니 오이니 재배하기 좋은 모래땅이 있었고 그리고 신천이 흘렀다. 아마도 창말이란 동네 이름은 한탄강과 임진강 수계, 그리고 신천의 물길을 이용하여 징수한 조선시대 공물을 모아 두는 창고가 있었음에 연유하는 것 같다.
공물이란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도록 강제한 공납의 의무를 지워 걷던 물화인데, 수백년간 서민들에게 갖은 폐해를 끼친 원수 같은 납세제도이다. 임진왜란이 지나면서 공물을 쌀로 바치게 하는 대동법이 생기면서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나 조선시대 서민들의 피를 뽑던 상징 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 공물을 거두어 보관하고 옮기도록 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이 창말이다.
또 일제시대 일본이 간도와 연해주로 진출하고 원산이라는 동북아 최고의 부동항임과 동시에 수산자원의 보고였던 항구의 군사적, 경제적 이용을 위해 부설한 수탈의 상징이던 것이 경원선이다. 원산에서 유명한 원산말뚝이나 낭림산맥의 삼림자원, 광물자원이 이 철도로 들어왔고 간도 연해주로 일제 침략의 더러운 발길을 옮기던 나남사단의 병력들이 이 철도로 수송되었으리라.
창말은 이 두 악덕의 편의시설이 실제로건 이름만으로건 동시에 남아 있는 곳이다. 게다가 지금도 외국 군대가 우리 땅에 머물고 있다는 현대의 궂은 역사 까지. 슬픈 과거사에 수치스런 현대사이다. 어떤 이유로든 외국군대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모순은 없어져야 한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어릴 때부터 우리를 괴롭히던 공포의 원형질이었다.
더구나 전방과 가까운 이 곳에서는 일 년에 한 두 번 무장공비가 남하하면서 어디서 사람이 죽었다더라, 하는 유언비어가 돌기도 했다. 공포스러웠다. 박정희 정권은 한국 전쟁으로 인해 굳어진 사상의 대립과 돌이킬 수 없는 동족간의 미움을 이제는 공포심까지 조장하여 정권을 공고히 하는 데 썼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들은 우리들에게 언제나 강조하셨다. 북한에 대한 확고한 적개심과 공포심을. 그리고 그 공포를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미군주둔이라는 부적을 나누어 주셨다. 고마운 나라라고. 주일학교 선생님은 가르쳐 주셨다.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전해준 나라가 미국이라고. 우리에게 값 없이 와서 정의의 이름으로 북한군을 물리쳐주고 우리나라에 밀가루며 우유며 거저 주고 더구나 기독교까지 전해준 숭고한 나라가 미국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그 숭고함을 지금도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 정말로 숭고한 것은 한국인들의 단순성이다.
아무튼 북한의 위협은 그들이 우리 경제력의 1/10도 되지 않는 지금도 유효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의 역대 국방장관과 대통령, 그리고 군의 장성들에게는 전 왕조 식으로 볼기에 태형을 가해야 한다. 죽을 때까지 패야 한다. 그 많은 돈을 가지고 아직도 세계 최빈국에게 위협 받는 조국을 만들어 놓았으니. 하긴 자주국방이라는 단순한 말도 조국을 김정일에게 바치려는 배후가 있는 빨갱이의 언사로 모는 분들이 역대 군 장성 중에 계시니, 그리고 그 분들이 스스로 보수랍시고 깝죽거리는 세상이니 말 다했다.
얘기가 좀 샜지만 창말은 그런 저런 역사적 흐름의 지리적 교차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창말은 정감 넘치는 동네였다.
창말에서 내가 먼저 기억하는 맛이란 짜장면과 우동이다.
지금 국도 3호선의 큰 길가 약국에서 조금 내려오면 가게가 하나 있고 그 가게 밑으로 수정관이라는 중국음식점이 있다.
이 음식점이 있는 자리가 옛날 태극식당이라는 중국집이 있었던 자리다. 그리고 그 앞에 육십여 평 공터가 있었고 그 안쪽으로 우리식당이라는 한결 작은 중국식당이 있었다. 내 생각에 태극식당은 정통 중국음식(사실 아무리 한국의 중국집이 정통이라고 바득바득 우겨도 중국 본토 정통 음식은 아니다.)을 표방하던 곳이었고 우리식당은 중식과 더불어 육개장이니 국밥이니 하던 것들도 팔았던 것 같다.
내가 여섯살 무렵에 창말교회서 운영하는 창말유치원에 다녔는데 수요일마다 간식 시간이 있었다. 우리는 한달에 한 번은 이 두 식당에 번갈아 가서 짜장으로 입가를 맥질하고 우동 그릇을 엎었다. 외식 문화가 발달하지 못하던 때 (나 유치원 다니던 때가 정확히 1974년이다. 와우, 1974년!!!) 아이들이 가장 먹고 싶어하는 음식이 바로 짜장면이었으니 다른 건 둘째 치고 상대적으로 잘 먹었던 어린시절이었다.
지금도 요 지점만 지나면 들린다. 쿵쿵 면을 치던 소리가.
그리고 춘장과 카라멜이 양파 감자 등속을 볶은 것과 어우러져 풍기던 향내가 그 소리의 기억과 오버랩되어 들먹거린다. 지금 왠만한 집 아니면 섣불리 짜장면을 먹으러 가지 못한다. 짜장면이라기 보다는 아지노모토 범벅이라 자칫 잘 못해서 짜장면을 먹었다 치면 하루 종일 들치근한 조미료의 풍미를 자일리톨이니 멕시코 치클이니 카페인이니 하는 걸로 중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억 속의 짜장면은 맛있었다.
짜장을 선택하지 못하고 일률적으로 우동을 먹어야 했던 적도 있었다. 아마 짜장이 튀면 옷이 지저분해지고 그 옷을 빨아야 했던 학부형들, 특히 학부형 중 "부"도 '형"도 아닌 "모"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동은 재미가 좀 덜했다. 맵지도 달지도 않은 것이 맹숭한 국물에 허연 면이 들어 있는 것은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왠지 정성이 부족한 상차림 같았다. 내 유치원 고시 동기들은 시름시름 짜장 타령을 해댔지만 그래도 이내 한 그릇 씩 싹싹 비웠다.
나는 이 우동이란 음식도 좋아했다. 선천적으로 매운 것을 먹지 못하고 단 것도 밝히지 않는데다 그 때부터 애국자의 면모를 보이느라 국물이 있는 음식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요즘에야 청양고추를 팍팍 썰어 넣어 칼칼하니 맵게 끓인 우동도 유행하지만 그거야 각박한 세상에 걸맞게 매운 맛이 맛의 지존으로 대우 받는 요즘 한국 미각사회의 일이고 당시만 해도 우동은 맵지 않고 은근한 맛이 있었던지라 지금도 단정한 음식으로 여기게 됐다.
이 식당들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무렵 까지 있었다. 그리고 태극식당의 아저씨가 돌아가시고 주인이 바뀌도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도 오며가며 인사 드리는 부부내외가 수정관이라는 제목으로 춘장을 볶고 면을 뽑고 만두와 탕수육을 튀기고 있다. 공장이 들어선다고 철둑 아래를 다 밀어내기 전 까지 점심 무렵이면 바쁘게 오토바이에 철가방을 싣고 다니던 아주머니를 자주 뵀는데 지금은 공장들이 다 헐려 새 공장들이 들어설 때까지 한참이 남은지라 어찌 사시나 궁금도 하다. 이렇게 보면 개발이란 거창한 계획으로 수혜를 입는 토박이란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더 아래로 내려가 보면 오복상회란 쌀가게가 있고 경북상회란 정육점이 있었고 평북상회와 황해상회라는 가게가 나란히 골목 하나를 격하고 있어서 식료와 과자 등을 팔았다.
오복상회는 그 가족의 모든 구성원들과 절친하게 지냈고 그 집의 장녀는 나와 유치원 고시 동기이고 교회 주일학교와 학생회에서 잘 지내던 동아리고, 시집 갈 때 축가도 불러주었던 집안이라 어느 떄는 뜬금 없이 들러서 밥도 먹고 가던 집이다. 경북상회는 지금 간판이 있던 옛 허울만 남았고 2대를 이어 경영하던 형님이 이사를 가신 뒤로는 자주 뵙지 못한다. 평북상회건 황해상회건 가게는 이미 접은 지 오래다. 황해상회는 며느리가 통닭과 생맥주를 팔면서 종목을 변경하였으나 인구의 팔할이 빠져나간 작은 동네에서 간판을 지탱할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하다. 철로 밑에 있던 우리집에서 보자면 황해상회가 가까운데도 우리 집에서는 꼭 평북상회만을 애용했다. 같은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도 있었고 외상거래가 가능했다는 점도 작용했던 것 같다. 그래도 황해상회를 지나 평북상회에서 물건을 사고 오면서 황해상회 주인 내외분의 시선을 받으며 가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후일 며느리되는 분이 튀겨주는 통닭도 많이 사 먹고 그 집에 동네 어르신(사실은 같은 교회 장로님 집사님들)의 눈을 피해 그 어르신들의 자제영양들과 잠입하여 마신 소주가 가히 트럭급은 안 돼도 손수레급이요 맥주가 수족관급이니 이것으로 면피는 되리라.
황해상회에서 몇 집을 건너 철길 바로 옆에 열쇠가게가 있었다.
창말에서 가장 부지런한 어른으로 나는 평북상회의 장로님 내외분과 열쇠가게의 내외분을 꼽는다.
열쇠가게는 열쇠를 파는 곳이 아니다. 아마 내 추측으로는 윗동네에서 진짜 열쇠가게를 하시다가 여기로 내려오셔서 간단한 과자니 찬거리니 배추 무우 등 농사 지은 소출을 내다 파는 가게를 여신 것인데 열쇠에서 손을 놓으신지 거의 35년이 넘건만 아직도 동리에서 열쇠가게로 호가 나고 있으니 전과라는 것이 무섭긴 무섭다. 이 분들은 새벽에 일어나 문을 열고 아저씨는 작은 논밭을 갈고 아주머니는 가게를 청소하고 장도 봐오시고 하셨다. 그리고 여기 작은 주막처럼 옆의 공간에 술청을 여셨는데 동네의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이나 술 좋아하는 양반들은 모두 여기로 모여 호연지기를 한껏 발산하셨다. 우리 아버지도 여기서 자주 술을 드시곤 하셨는데 유독 목소리가 크셔서 한 번 술을 드신 날이면 동네 사람들이 모두 알 정도였다. 주정을 하거나 하신 거도 아닌데.
호연지기는 호연지기로 끝나기 않는 것이 절대불변이라, 때로 심심찮게 활극이 벌어져 우리 꼬마들은 어른들의 랭킹을 매기곤 했다.
또 사계절의 먹거리가 어찌 돌아가는지 훤히 알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봄이면 봄나물, 여름이면 콩국수, 가을이면 밤이며 도토리 묵이 접시 사이에서 맴을 돌았고 겨울이면 참새 구이나 묵은지도 나섰다. 누가 뭘 가져왔다면 그걸 빌미로 모이고 열쇠가게에서 열쇠 아닌 소주나 막걸리를 사다가 시름을 잊는 것이다. 김치니 마른 반찬이니 하는 것도 염가에 써빙됐던 모양이다.
그러나 여름엔 뭐니뭐니 해도 견공이다. 오죽하면 공, 후, 백, 자, 남의 작위 중 공작의 지위를 수여하였을까?
하여간 어린 시절 내 목전에서 죽어나간 견공을 추모하자면 향 두 가마니는 피워야 한다. 그런데 견공을 잡는 방법은 영 공작을 대하는 예의가 아니다. 일단 그날의 "꺼리"로 지목된 견공을 잡아서 대뜸 올가미를 걸어 철로 주변 오동나무나 전봇대에 묶어 올린다. 버둥대는 견공에게 무차별적인 마사지가 가해진다. 그리고 완전히 죽으면 짚단이나 토치로 털을 완전히 그슬린다. 짚단에서 토치로 발전한 무렵이 아마 1981년 같다 당시 나타난 전두환이 그렇게 부르짖던 새 시대가 여기 견공의 아우슈비츠에서는 괄목할 만한 기술의 진보로 나타났다.
그러고는 바로 해체작업에 들어가서 내장을 발라내고 원하는 분들에게 나이 순으로 피도 한 사발씩 돌리고 고기를 큰 가마솥에 넣어 삶느다. 옆에서는 양념도 조제하고 군침도 흘려가면서 눈을 번득이는 갤러리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견공의 죽어가던 모양과 털 그슬리는 냄새, 솥에서 나는 냄새가 내게는 몹시 역했다. 그것이 지금도 내가 보신탕을 못 먹는 이유의 가장 큰 부분이기도 하다. 세상에 어떤 짐승을 잡는 방법이 고상할까? 하지만 보신탕을 접할 떄 마다 아니, 연상할 때마다 나는 털 누린내는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는 대상이다. 후일 보신탕집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가서 전골 한 점을 집어먹었는데 그 맛이 굉장히 좋은 것에 놀랐다. 그러나 그건 순간의 일이고 아직도 보신탕을 받아들일 자세가 돼있지 않다.
내가 원래 살던 집은 열쇠가게에서 철로를 건너 철둑 바로 옆에 있었다. 기차가 지나가면 진동이 심하게 전해졌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명당이었다. 길가에 있지만 길을 바로 바라보지 않았고 물이 잘 빠졌다. 마당과 뒷곁이 아늑했다. 그리고 집을 나서면 서남쪽으로 밭과 논이 있었다. 바람은 신기하게 잦아들고 볕이 희한하게 잘 들던 집이었다.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다른 집들처럼 ㄱ자형으로 꺾였고 행랑채가 작은 안마당을 격해서 있었다. 재래식 화장실이 문간에 있었고 뒤란으로 통하는 목에 창고가 있었고 창고 위의 옥상에는 장독을 두었다.
옛날에는 난방을 모두 장작으로 했다.
이 장작불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식구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릴 적엔 가마솥으로 장작에 불을 때서 밥을 했다. 지금도 이 때의 밥맛이 그립다. 물론 누룽지도 빠질 수 없다.
요즘은 한정식 집이 많이 생겨서 여기 저기를 다녀봤지만 대개 반찬의 가짓수로 승부하는 집들이다. 반찬 가짓수에 쏟는 정성에 못지 않게 밥에 신경을 쓴다면 식당 신발장에 신발이 훨씬 많아질 것이다. 제대로 쌀을 불리고 가마솥에 장작을 때서 밥알 하나 하나가 탱탱하고 기름지게 밥을 짓고 누룽지도 알맞게 눌리고 손님상에 대령한다면 짠지 하나로도 맛있는 식사가 될 터수인데, 우리 밥상의 진짜 주인공인 쌀밥이 무시 당하는 것 같아 한정식 집에만 가면 복장 터진다. 내 별난 입 호사 취미를 탓해야 하나?
가마솥은 온도의 전도와 대류 효과, 그리고 적당한 증기압을 유지해 주는 효과가 뛰어난 과학적 유산이다. 그리고 장작불은 센 화력을 보장한다. 또 장작불이 괄해졌다 싶으면 장작을 빼내고 은근한 숯불에 뜸을 드일 수도 있다. 나는 농 삼아 이렇게 밥 짓는 작업을 "대충 꼼꼼히 한다"라고 표현한다. 대강의 눈대중이 만들어 내는 예술의 결정체가 가마솥에 장작불로 밥짓기인데 어린 시절 우리 집 부뚜막에서는 매일 이런 과학적 실험이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마솥의 추억은 또 다른 명품 요리인 비지와 연결된다.
우리 어머니가 하시는 비지는 정말 명품이었다.
겨우내 집 담장 위에 쳐진 철망에서 황태처럼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며 말리워진 우거지, 시래기와 돼지 사등뼈, 그리고 너무 미세하지도 너무 거칠지도 않게 맷돌에 갈리운 콩이 가마솥에서 나름대로의 물리적 화학적 결합을 거쳐 만들어진 비지는 역시 가마솥에서 지어낸 조밥과 같이 먹어야 제격이다. 간장에 고추가루, 파 등을 썰어 넣어 만든 양념장과 버무려 먹으면 우거지와 시래기의 녹록지 않은 맛과 콩의 고소함, 사등뼈를 우려낸 진한 맛이 감치게 전해졌다. 집이 연탄난방을 거쳐 새로 이사간 집에서 연탄 보일러, 기름 보일러로 바뀌고 취사는 곤로와 가스레인지로 형태가 바뀌어도 우리 집 마당에는 항상 가마솥이 걸려 있어 이 비지를 한 번 씩 해 먹곤 했는데, 재작년 아파트로 이사오면서 이 맛을 잃어버렸다.
장작불은 가마솥과 어울리지 않더라도 많은 추억을 제공했다.
장작불에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놓고 돼지 비계 기름을 내어 부치던 북한식 녹두 빈대떡, 명절날 집에서 빚은 만두를 장작불 옆에 기와를 달궈 구워 먹던 형들에게 얻어 먹던 기억, 그리고 만두 외에 간간이 구워지던 USA ARMY 보급용 햄과 소세지, 베이컨은 별미였다. 또 지금 창말서 소요산 가는 길 오른 편에 상수도 공급소가 있는 곳에서 도로까지 좀 척박하고 경사진 밭이 우리 집 소유였는데, 거기서 소작료 겸 나오던 고구마를 구워 먹던 맛은 기가 막혔다. 당시는 주방용 쿠킹호일이 나오지 않던 때였지만 미제의 수혜를 가장 많이 받을 수 있었던 우리 집과 큰 집의 사촌간들은 알루미늄 호일로 고구마를 싸서 모닥불에 구워 먹는 탁월한 혜안을 발휘할 수 있었다.
말이 나왔으니, 우리 형제만큼 Made in USA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와 큰 아버지가 공동으로 운영하던 사업은 미국부대에서 나오는 폐기물이나 고물, 남는 식자재를 처리하는 사업이었다. 소위 오물장이었다.
당시 변변한 제조업이 없던 실정에서 오물장 사업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수 많은 고철과 빈 깡통, 심지어 탱크의 캐터필더 등이 고가로 고철 장수들에게 팔렸다. 수 많은 서류와 폐기된 기밀문서들, 서적 등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 중에는 플레이보이지나 펜트하우스 등 당시 선데이서울 급 정도에 만족하던 한국의 X-매니어들에게 사뭇 동경심을 일으키던 종류의 책자도 쏟아져 나왔다. 이런 것은 헌 책 장수나 종이공장으로 팔렸다. 그 밖에 미군부대에서 쓰다 남는 식자재가 반듯한 박스에 실려나왔다. 이를 이름하여 부대빵, 전문용어로 걸레빵이라 하였다. 이 부대빵은 하루에 수백 박스씩 나와 염가에 팔렸다. 가난한 이들의 훌륭한 탄수화물 보급원이 되었을 것이다.
그 외에 당시 그 비싸고 귀하다는 바나나는 창고로 가득이었고 날짜가 약간 경과한 냉동 스테이크 고기 등은 지천이었다. 나는 우리 반에서 김치를 안 먹고 스테이크를 먹으며 자란 유일한 아이였다. 나는 정말 유복한 집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친구들 집에 가서 그 집 밥을 얻어먹을라 치면 그 친구들의 어머니들은 백이면 백 그 어린 것들 중 나에게만 말씀하셨다. "얘, 너희 집은 부잣집이라 맛있는 것 먹을텐데...." 지금 생각하면 나는 미국의 속국 한국에서 미국군인들의 잉여물로 먹고 입고 자란 것이라 조금은 그렇지만 결코 그 사업을 하시던 우리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그 분들은 맨손으로 평양에서 피난나오셔서 그만한 사업을 이루셨고 시세를 멀리 보고 열심히 일하셨다. 미2사단에서 많은 물품을 빼내오는 것은 더 많은 못사는 한국인들이 먹고 살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미국의 국부였고 지독한 한국인들의 생존방식이었다.
이 한국인들의 생존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음식이 부대찌게다.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먹다 남은 햄, 소세지, 햄버거 패티, 감자, 양파, 스테이크 조각, 베이컨, 치즈, 말고기, 양갈비 기타 고기 등속 등을 김치, 파, 마늘과 함께 부글부글 끓여내는 것인데 지금 동두천 역이 있는 주변 미국부대 후문 앞에 이 부대찌게를 파는 집이 많았다.
요즘 부대찌게라면 의정부 부대찌게 골목의 오뎅집이 유명한데, 내가 먹어본 결과 의정부의 부대찌게는 원래 부대찌게와 좀 다르다. 하긴 다른 부대찌게 집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즘 부대찌게에 넣는 재료들은 주로 스팸과 소세지인데 사실 원조 부대찌게에 넣는 재료들은 이보다 더 다양했다. 그리고 같은 저장음식이라고 해도 스팸이나 국산 소세지가 갖고 있는 맛은 좀 밋밋하다. 여기에 아무리 육수를 개발한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그러나 원조의 맛을 살리는 동두천의 몇몇 집들은 햄버거 패티나 스테이크 고기, 미제 소세지와 정체불명의 햄, 그리고 심지어 튀긴 닭고기 등을 교묘히 섞어 국물을 우려냈다. 여기서 나오는 국물맛은 오묘했다. 그러나 지금 이 부대찌게 집들은 이제 거의 없고 한 두집만 남아서 영업을 하고 있는데 재료가 끊겨서 그런지 옛날 맛은 나지 않아도 그래도 비스므레한 맛들을 낸다.
부대찌게에 대한 애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다시 창말로 돌아가자.
이 오물장 자리는 열쇠가게 앞 창리 건널목을 지나 곧장 가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농장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 쪽으로 약간 휘는 직진로을 가서 왼쪽에 처음 나오는 넓은 곳이다. 여기서 더 내려 가면 오른쪽으로는 주로 농사를 짓는 가구들이 약 10여 가구가 있고 왼쪽으로는 큰 양계장이 있었다.
이 오물장과 양계장 자리는 비교적 강가에 면한 저지대인데도 물이 잘 빠지고 아무리 큰 물이 들어도 물에 잠기는 법이 없었다. 이 자리는 원래 군대의 병영이 있었던 곳이고 사람에 따라서는 그 전 조선 시대 창고가 있었던 자리여서 창말의 지역명이 여기서 기원했다고 하는 이도 있다. 그 위치는 다시 비정해 봐야하는 일이겠지만 만약 맞는 말이라면 우리 조상들은 큰 물에도 잠기지 않는 물가의 평탄한 곳을 알아보는 지혜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1998년인가 동두천에 큰 물이 들어 상류의 보산동과 생연동 일대가 다 잠기는 난리가 났었는데 하류의 저지대였던 우리 집은 무사했다.
그리고 예전에 있던 농장방향으로 가다가 콩나물을 기르던 온실이 초가 지붕 밑에 있던 콩나물집을 못 미쳐 오른편으로 꺽어 둑길을 걷다 보면 신천이 나온다.동두천의 젖줄이다. 여기 창말에서 신천 건너편 마차산 기슭의 도곡으로 가는 통로처럼 저수둑이 있었다. 아마 신천의 물을 가두었다가 소요초등학교로 가는 서편 황하터 지역의 전답에 물을 대려고 했는 듯 둑 옆으로 수문이 있었고 이 수문을 통해 물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예전에는 이 둑으로 물이 저수돼서 이 물에 놀잇배도 다녔다고 한다.
이 둑을 건너기는 갈수기 때는 쉬웠다. 다만 둑의 2/3 지점에 1미터 폭으로 2~3군데 물길을 터서 물이 일정량 하류로 흘러가게 만든 지점에서는 겁이 나기도 했지만 8살 무렵부터는 잘 건너 다녔다. 하지만 장마 때나 홍수가 날 때는 보기만 해도 무서울 정도의 급류가 둑에 부딛쳐 길길이 뛰었고 간혹 죽은 이의 시체도 내려오기도 했다. 어느 때는 건너 편 마차산 기슭에 사시던 아주머니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둑위로 발목이 넘게 흐르는 물을 신발을 척 벗어쥔 채로 아이 손을 끌고 건너는 모습을 보았는데 지금 기억에도 조마조마했었던 것 같다.
이 둑길을 지나 산길로 따라서 가자면 마차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고 왼쪽으로는 신흥 중학교 가는 길이, 그리고 오른 쪽으로 한 사오리 길을 가면 소요초등학교가 나오는데 조기축구회 멤버였던 아버지를 곧잘 따라 다니곤 했다.
둑 아래에는 물이 바로 떨어지는 곳에는 깊은 소를 이루었고 그리고는 얕은 모래톱과 용암이 분출되어 흘러간 흔적이 남은 아기자기한 기암들이 있었다. 강변에서 훤히 내다 보이는 곳이라 인근의 농사꾼들이 가끔 소를 풀어 놓기도 했고 낚시꾼들이 낚시를 즐기던 곳이다. 여기 얕은 물의 모래톱과 화산암들이 만든 오목조목한 곳에서 일쑤 모래무지며 꺽지 등을 잡고 노느라 하루 해가 다 가고 가끔 물에 빠져 신발과 바짓단을 다 적셔서 어머니께 혼뜨검이 나기도 했다.
가끔 동무들과 모래무지 등을 모래톱 근처 바위 틈에서 구워먹기도 했는데, 그 맛은 기가 막혔다. 지금 생각하면 디스토마니 어쩌니 겁날 만도 하다.
여기 둑에 늦봄이면 참게들이 산란을 위해 기어 올라왔고 겨울이면 얼음을 깨고 모래무지를 잡기도 했다. 붕어나 잉어도 제법 잡혔다. 겨울이면 얼음을 지치고 놀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 강가에 차츰 가죽공장 등이 들어 오면서 고약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고 물고기들은 등이 굽었다. 물이 점점 더러워지면서 겨울엔 제대로 얼지도 않았다.
철로 아래의 동리는 모조리 없어졌다. 우리가 큰 집 작은 집 모여 산다고 정타운이라 이름 붙인 곳도 없어졌고 추운 성탄절에 새벽송을 돌러 다니던 길도 없어졌다.
개발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행사들은 지극히 잔인하고 무차별적이었다.
우리 집도 이사를 나왔다.
이미 우리 집안의 영화는 오래 전에 쇠한 터여서 낡고 크기만 한 옛 집과 옛 오물장 터는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고 우리는 하루아침에 주인에서 전세 주민이 된 지 오래였다. 개발의 보상은 아주 적었다. 그렇게 살던 곳을 떠났다. 아마 미련 없이 떠난 것 같다.
그러나 이제 다시 미련이 생기고 놀던 자리 걷던 길, 인사드리던 어른들과 지금은 팔도와 아메리카로 흩어진 동무들과 좁은 줄 모르고 놀던 골목길, 금간 담벼락, 내려 앉던 슬레이트 지붕 등 창말의 씨줄과 날줄을 이루던 모든 것들이 생각나는 것이니 정말 사람이란 간사하고 그 중 나는 더 간사하다.
창말은 이제 추억만 남은 곳이 됐다. 약간의 주민들이 살고 공장지대가 아닌 안창말의 고지대나 신작로 부근에 새로 조성된 주택단지에 외지인들과 헐린 집을 두고 새 집을 지은 창말 사람들이 둥주리를 틀었다. 집들은 새 것이고 가히 전원주택 풍이라고 할 만한 것이나 옛 창말은 아니다. 다만 창말교회만이 그대로 있어서 옛 창말 사람들을 일주일에 한 번 씩 볼 뿐이다. 오호 애재애재로다.
나는 집이나 무덤자리를 보는 풍수지리를 별로 믿지 않는다.
해골 덕이나 보려는 그 음험함이나 길흉화복을 땅 꼴로 돌리려는 심사가 싫다. 죽은 사람의 기가 어떻게 산 사람의 생생한 기를 누를 수 있고 어떤 은혜나 끼칠 수 있을까? 그러나 양택이나 물길 등을 보는 풍수지리에는 오묘한 통찰력이 있다고 본다.
산을 등지는 것과 좌청룡 우백호는 북풍한설이나 높새바람, 하늬바람을 피하려는 것이겠고 물을 앞에 두는 것은 첫째 물을 얻기 좋게 하고 둘째, 남에서 오는 위협에 대해 일단의 바리케이트를 치는 것이요 셋째, 물길을 이용한 수운의 편이함을 얻기 위함이요, 넷째, 어로를 통해 삶을 영위하려 함이요, 다섯째 경관의 묘를 얻어 심리적 만족을 얻음이다. 또 문 앞으로 대로를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홍수가 들이치는 것을 방비하는 것이고 도적들이 바로 엿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풍수지리의 과학성이 동양 특유의 신비와 과장으로 해골의 음덕으로 산 사람이 재상과 장군과 군왕에 이르고 썩지 못한 시체의 저주로 산 사람들이 궁핍하게 된다는 것은 풍수지리의 원뜻을 훼손하는 것이리라.
지금 창말은 과거 수천 명의 인구가 모두 떠난 동리가 됐다.
이건 풍수지리의 탓만이 아니다. 풍수의 꼴이 사회의 변동과 국가 혹은 지역정책과 인문지리 등과 연관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물이 있는 연유로 창고가 있었고 서울로 통하는 통로에 탱크가 기동할 수 있는 평탄면이 있었기에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주공격 방향이 됐다. 북한의 포격과 폭격을 효과적으로 피할 수 있는 천혜의 분지지형이므로 미군이 주둔하였고 그로 인한 특수를 얻었다. 전국에서 먹고 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일개 마을을 이루었다. 지역에 대학교가 없었고 큰 일터가 없어서 젊은이들이 떠나야했다. (공장보다는 괜찮은 대학 분교 등을 유치하거나 교육에 힘을 쏟아 지방 명문고등학교를 양성하던가 입시 학원으로 변질된 외국어 고등학교가 아닌 예술이나 요리, 골프 등을 배울 수 있는 특수고등학교를 유치하고 양성했어야 했다.) 또, 떠나지 않더라도 서울로 고단한 출퇴근을 해야만 했다.
동두천 남쪽에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이사가는 집들이 늘었다. 신도시로 이사가는 것은 거의 트렌드였다. 그리고 전철이 들어오면서 철둑 주변의 세대들도 전세금 정도나 겨우 받고 이사가게 됐다.
또 피혁단지가 들어오면서 농사를 짓던 이들이 삶을 영위하는 방법을 달리해야 했고 집과 공장을 짓고 벌고 살던 이들이 모두 떠나야 했다. 내가 살던 철로 아래의 집과 중학교 2학년 떄 이사간 오물장 터의 집들도 다 헐리고 어디가 어딘지 구분할 수 없게 온통 밀어놓아 훵해진 제2산업단지 터가 됐다.
나는 정말 소원한다. 여기 괜찮은 기업들이 들어오길 바란다.
그러나 정말 그 방법 밖에는 없었을까?
왜 논과 밭은 그 존재 자체가 죄스러운 일이 돼야 했나?
왜 가죽공장 염색공장의 냄새를 우리 순박한 창말사람들이 닫을 수 없는 콧구멍으로 꼭 들이 마셔야 했나? 피혁단지와 제2산업단지는 과연 동두천을 영구히 먹여살릴 방안이 되는가?
나는 이육사의 시에 나오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광야가 된 창말의 터전에서 목 놓아 울 수는 있다. 창말교회에 갈 때 마다 나는 옛 우리 집이 있던 곳을 의도적으로 돌아보지 않으려 한다. 목 놓아 울 것 같은 기분에서였다. 그리고 헤어진 옛 연인의 타락한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은 절통함이 무섭기 때문이다.
지난 번 여름에 한국에 휴가차 가서 신천변에 뚫린 강변도로로 전곡까지 간 적이 있었는데 오른쪽의 우리 집이 있던 곳을 보지 않고 마차산과 신천줄기만을 보았다. 물이 깨끗해졌음인가, 가마우지가 떼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하릴 없는 그들의 날개짓만을 보며 지나갔다. 차창을 열어둬서일 것이다. 눈에서 금방 눈물이 났고 금방 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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