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죄하는 마음으로 글을 연재할까 합니다. 이담만유1. 연재 시작.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정수구
댓글 0건 조회 3,621회 작성일 09-10-21 23:41

본문

 안녕하십니까?
 바리톤의 정수구입니다.

 귀국하고 나서 정말 열심히 합창단 생활을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여기 동두천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니 목요일에 연습하러 가는 일이 힘들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 계약 기간이 끝나고 좀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달에 계약이 끝납니다.

 아무튼 너무나 죄송하고요.
 
 사죄하는 의미에서 제가 말레이시아에서 1 년 넘게 고향 동두천을 그리워하며서 썼던 고향과 고향의 맛집에 대해 절찬리(?) 연재했던 글들을 올리고저 합니다. 이름하여 <이담만유>.

 저는 조월태 형님이 가끔 올리시는 시작을 보고 너무나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그 詩作의 탁월함과 바쁜 일상에도 글을 쓰시는 모습(시인을 비롯한 글쟁이들의 글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를 미분하고 뼈를 깎는 고통을 적분해야 나오는 것이길래...)을 보면서 문학을 전공한 문학도의 글이 제 악곡 분석에서 보듯이 너무 엔지니어링적인 세분 분석에 머무르기 않았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이 올리시는 글들을 보면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제 글은 약간 이념적 편향성을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는 그래도 제 고향에 대한 사랑이 있는 글이라 생각하고 보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연재되는 글들은 출판사를 거쳐 곧 인쇄될 예정입니다. 그 전에 많은 질책을 바랍니다.




그럼.

연재 시작....




<이담만유>

이담은 동두천의 옛이름이다.

 못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내가 원래 살던 동리는 창말이다.


 


 창말에서 소시적의 학문연마를 위하여 4, 5 리 떨어진 동보초등학교로 가자면 철둑길을 따라 가는 방법도 있지만 그 전에는 논을 대각선으로 질러 지금 안흥교회 가는 길로 가는 수도 있었다. 일대는 모두 논밭이었고 두엄탕이 여러 곳에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물이 많이 솟는 곳이었다.


 논길이지만 그래도 경운기나 수레가 지나갈 많한 길을 가다 보면 큰 소며 못이 자못 시퍼런 깊이를 이루고 있는 곳도 있었고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형들이 늦 봄 무렵부터 초기을까지 고기를 건져올리던 모습도 일쑤 보았다. 또 철둑을 따라가자면 큰 오동나무와 비 없는 무덤이 있는 곳에서는 철둑 반대편에서 흐르던 시내가 다시 솟아나와 모낼 무렵 농꾼들에게 더 없이 반가운 논물을 대줬다. 창말의 우리집에서 마차산으로 가자면 신천을 건너는 둑을 하나 지나야 하는데 둑까지 가는 길과 같은 방향으로 시내가 있고 그 시내도 꽤 많은 수량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시내의 자취는 있지만 물을 끊겼다. 한국사람들의 원형질에 보관된 고향의 이미지가 훼손되려면 첫째 조건은 시냇물이건 못물이건 강물이건 간에 물이 말라간다는 것이다.(댐으로 수몰된 고장은 제외다.)


 


 동두천이나 이담이나 '천'이나 '담'이나 어쨌든 물과 관련된 지명인 데다 지금 사람들이 동두천으로 알고 있는 어수동과 생연동의 '수'자, '연'자도 역시 샘과 못을 나타내는 글자인지라 아무튼 우리 동두천이 물이 많이 있는 지역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튼 이 물 많은 동두천에서 태어난 나는 그림 같이 아름다운 '천'과 '담'이 꼬박 들어찬 전원적인 풍치의 도시 동두천이 아닌 다른 종류의 '물'이 흘러 들어온 동두천을 보고 자랐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유감이다.


 


 그 색다른 '물'이란 바로 "미류美流"다.


 


 지금 인근 나라로 퍼져가는 "한류韓流"라는 열풍이 거세기도 하지만 한국 전쟁 이후 한국에 불어 닥친 미국의 입김만큼 대단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미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도시가 동두천이다.


 아마 부정적인 영향이 더 클 것이다.


 그러나 나 어릴 때 입던 옷과 우리 가정의 일용할 양식을 획득하는 데 필요한 아버지의 사업이 모두 미 국방성에 의존하였으므로, 그리고 덕택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으므로 나의 미국에 대한 지금의 심사야 어떻건 간에 일단은 떨떠름하게나마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이 미류의 영향으로 갈 데 없던 피난민과 외지인들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원래 동두천(현재 턱거리에서 흘러서 동보초등학교 앞으로 빠져 신천으로 흐르는 개천의 중간 평탄지역을 일컫는데, 아마도 동쪽 에서 물이 흘러들어온다고 하는 말일 것이다. 지금은 머리 두자가 쓰기 번거롭다고 콩 두자를 쓴다. 공식 문서에 한문을 얼마나 많이 쓴다고 지명의 원류를 바꾸는지 모르겠다. 동쪽 콩 개울~) 동네에 미군부대가 세워지고 거기서 나온 사람들은 미군부대 바로 앞 역전이나 보산리, 또는 아예 미군부대 너머 걸산리, 턱거리, 싸릿말로, 또는 창말로 흩어지거나 아예 생골이나 연골, 어수동으로 밀려나게 됐다. 그리고 여기 동두천 사람들이 밀려나온 보산리와 어수동에 외지인들이 먹을 것을 찾아 들어오게 됐다. 팔도의 모든이들과 원주민 아닌 원주민들이 엉켜 살게 되니 그야말로 동두천은 동두천 아닌 동두천이 된 데다 팔도인들의 인구비례가 황금률을 이루면서 게다가 맞춤하여 바다 건너온 외지인들의 희고 검은 낯빛이 어우러지면서 음식으로 치자면 정말 부대찌게 같은 국제도시가 됐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게다가 단군할아버지는 고사하고 고종황제 폐하도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쵸컬릿, 빠다, 비스켓, 껌 등의 식재료가 쏟아져 나오는 식향이 됐고 외지인들을 손님으로 맞이하려는 갸륵한 마음의 편린인지는 몰라도 양귀비들의 집성촌이 생기며 급기야 색향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했다. 거기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음반이나 악기를 구하는 풍각쟁이들과 땐쓰홀(댄스라고 하면 맛이 안 산다.)에서 삶을 영위하는 금과슬을 타는 이들 각과 저를 부는 이들이 모여 풍류향으로서의 신색을 더하고 무림의 협객과 풍운의 재주꾼들이 모두 모여 사는 고장이 됐다.


 


 동두천 내기들은 외지에 나가면 동두천서 왔다고 말하기를 꺼려했다.


 동두천 출신이라고 얘기하면 대뜸 미군부대, 양색시, 부대찌게 등등의 얘기를 꺼내는 점잖은 동네 출신의 추한 양반들 때문이었다.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이들의 눈빛은 우리를 우리 고장 출신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했다. 동두천의 이름은 우리 시대 환향녀였다. 우리 부모님들은 우리를 동두천 교육청과 연관지을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쓰셨다. 서울 도봉구의 엔간한 중고등학교에는 동두천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한반에 한 둘 있게 마련이었고 아예 서울에 집을 얻어 나와사는 경우도 있었다. 요즘 강남에는 기러기 아빠가 많이 다닌다고 하는데 그 양반들이야 천만리 머나먼 길에 자식과 부인을 보낸 경우지만 동두천에서는 단 백리길 너머로 자식과 어떤 축은 부인들까지 보낸 경우가 허다하니 강남보다 수십년 전에 이미 기러기 아빠를 양산한 선진적 모습이 기실은 동두천이 주는 "미류"의 이미지와 거기서 파생되는 갖가지 교육적 문제 때문이리라.


 동두천에서 밥을 벌어 먹으면서 내 자식만은 동두천에서 교육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우리 부모님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우리는 직장을 택해도 서울로 나섰다. 또 이미 쇠락해버린 기지촌의 경기로는 우리들을 먹여살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도 지금 말레이시아로 왔다.


 


 사람은 과거의 동물, 우리 나이로 마흔이 되니 이젠 기억이 사라져가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게 된다. 거기에 반발하여 여기 만리타국에서 사라져가는 기억의 뇌세포를 일시 살려 고향에 대한 추억을 되살리려 한다. 기억과 사실은 다를 수 있다. 아니 달라야 한다. 그리고 기억과 추억은 또 달라야 한다. 나는 사실보다는 기억에, 기억보다는 추억에 의지하여 이 글들을 쓰려고 한다. 바로 내 고향 동두천에 대한 추억이다.


 


 나는 천성이 맛을 고약하게 탐하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추억을 더듬는 더듬이로서 미각을 주로 동원하려 한다. 어느 골목에 어느 음식점이 있고 어느 음식점에 어느 메뉴가 있고... 하는 식으로 더듬어보려한다.


 


 나는 천성이 게으르다. 둔한 글재주에 닳아빠진 기억력에 부지런하지도 않으니 이 글이 어떤 속도로 채워질 지 나도 모른다.


 그러나 추억이 내 머리의 꼭대기와 마음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이상 느리지만 써나갈 것이다. 그것이 하루가 멀다하고 묘지 없이 사라지는 내 뇌세포에 대한 추모이고 타국에서 달래는 향수이고 나에게 주어진 사라져가는 시간에 대한 최대한의 경의이기 때문이다.


 


 연재를 시작하며 두 가지 원칙을 정한다.


 하나는 절대 인터넷이 주는 정보에 의존하지 않고 내 기억에 의지하는 거다. 이 글은 누가 봐주기를 바래서 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자족감을 위해서 쓰는 것이다. 내 기억력과 추억을 인터넷이라는 목발에 의지하고 싶지는 않고 나만의 기억 속의 미로를 재구성하는 묘미를 누리고 싶음이다.


 또 하나는 음식점 얘기를 쓸 때 그 집의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맛과 스친 기억과 나의 추측으로 그 집의 내력을 알아내는 재미가 쏠쏠해야 한다.


 


 이담만유, 伊淡晩遊...


 동두천서 저무도록 논다는 뜻이니 저무도록 놀던 기억을 되살려 보자.


 


 "생각이여, 날아라. 황금빛 날개를 달고 저 높은 곳으로... 아름답고 정다운 곳 산들바람 부는 내 고향으로...."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가사 일부)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공유
  • 트위터로  공유
  • 구글플러스로 공유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