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담만유 12. 후루룩, 국수예찬 2. 희뿌연 마약, 콩국수.
페이지 정보
본문
콩국수, 희뿌연 마약.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더운 여름날. 이글거리는 태양은 높고 멀어 어찌 해 볼 수가 없다. 꼭 내 눈 앞에서 흘레 붙기를 예사로 하던 동네 싹수 없는 수캐도 지나가는 발정 난 암캐를 소 닭 보듯 할 뿐이다. 열대의 더위를 뺨 치게 더운 한국의 여름은 우리 진액을 다 앗아가고 힘도 빠지게 만든다.
극강의 더위.
이런 날 점심으로 무엇이 좋을까?
미역 냉국, 오이 냉국, 콩나물 냉국, 열무 국수, 냉면 같은 찬 음식들도 있다. 냉면 같은 확실한 겨울 음식을 제외하면 다 좋아 보이지만 특별히 이거다 싶은 녀석이 없다. 육개장, 삼계탕도 있지만 이미 물린 지 오래. 보신탕이라 칭하는 개고기에는 차마 입이 가지 않는 식성인지라 이 메뉴는 논외로 하고.
정답은 하나. 내가 더운 여름날이면 꼭 신들린 듯이 찾는 음식이 있으니, 다름 아닌 콩국수다.
콩의 영양학적, 약리적 효능이야 두 말 하면 예산 낭비다. 단백질이 많고 양질의 지방질이 있고 혈관에 좋은 각종 성분이 집결돼 있다. 이 콩은 몸의 열을 내리는데 도움이 된다. 또 여름철 허해지기 쉬운 몸에 진액을 보충해 주고 부기를 내리고 이뇨 작용이 있다.
어릴 때는 이 콩국수를 왜 먹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더운 여름날 우리 집에서는 가끔 콩을 맷돌에 갈아 국수를 말아 먹고는 했는데, 콩을 좋아하진 않았던 나로서는 비릿한 감을 없애려고 소금을 잔뜩 뿌려 먹었다. 안 먹으면 혼 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지금은 콩국수라면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탐하듯이 달려든다.
이제 여름날 점심이면 의례 콩국수 생각이 나고 한 번 콩국수에 ‘꽂히면’ 난 다른 산해진미는 돌아보지 않고 콩국수를 찾아 귀신 들린 사람 마냥 홀연 콩국수 집을 찾아 들어서는 것이다.
일을 잠시 쉬면서 사업을 준비하고 지인들의 자제들에게 영어 등을 가르치고 또 그 동안 못 읽었던 갖가지 책들을 두루 읽느라 한적한 곳에 작은 2층 건물을 세 내어 서재 겸 사무실 겸 공부방 겸 쓰면서 지낸 적이 있었다. 이 때 여름을 났는데, 책을 읽고 사업계획서를 쓰고 악보를 좀 훑어 보다 보면 훌쩍 점심 때가 다가온다. 그 때면 가까운 거리는 걸어가고 먼 거리는 차로 가면서 콩국수를 먹으러 다녔다.
콩국이 가장 맛있던 집은 장원 순두부 집이다. 동두천 시청 윗길로 올라가 못골이라는 동리가 나오는데 커다란 연못이 아직도 있고 수량도 제법 되는 못이다. 장원 순두부는 여기 못골 입구에 있다. 이 집은 국산 콩을 직접 재배해서 쓰는 것 같다. 콩이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고 고소하고 갈린 입자가 너무 거칠지도 않고 입에 닿는 느낌이 좋다.
이 장원순두부 집 얘기가 나왔으니 잠깐 이 집에 머물다 가자.
이 집은 순두부가 맛있다. 콩을 제대로 썼고 간수도 잘 썼다. 순두부를 시키고 여기 보리밥에 양념을 살짝 넣어 비벼가면서 순두부의 감촉을 즐기면 콩이라는 잡곡이 ‘잡雜’자를 쓰기에는 너무 고귀한 별종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집의 감자전과 두부부침도 별미이고 두부전골도 칼칼하니 괜찮다.
이 집은 양옥이 아닌 한옥집이다. 집은 전체적으로 ‘ㅁ’자 모양이다. ‘ㄱ’자 모양의 본채와 행랑채가 붙어 ‘ㄷ’자 모양이 되고 여기 사랑채가 모여 아늑한 안마당을 이루었는데, 중부지방 특유의 이 구조는 겨울철의 추위를 막아주는 역할도 하고 여름에는 안채와 사랑채의 사이로 바람이 들 수 있고 안채의 처마가 길게 대청마루로 나와서 여름 햇빛을 가린다. 그리고 안마당에는 널찍한 평상이 있어서 대청이나 평상에 앉아 구수한 이 집의 음식을 먹자면 흡사 고향집이나 외갓집에 있는 느낌이 든다.
이 집에서 따로 거른 약주도 은근한 맛이 있다. 약간의 요구르트 향도 난다. 누룩을 쓸 때 취나물이나 진달래 꽃잎을 섞는 것을 다른 지방에서 본 적이 있는데, 이 집도 특이한 누룩을 쓰지 않나 싶다. 물론 우리 전통술은 물, 쌀, 누룩 이 세 가지만 쓴다. 그래서 어렵지만 또 그래서 맛이 좋다. 일제 시대 없어지고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xml:namespace prefix = st2 ns = "urn:schemas:contacts" />박정희 정권 때 씨가 마른 우리 전통주가 못내 아쉽다. 프랑스인이 자랑하는 포도주, 독일인들이 즐기는 맥주, 일본인들의 사케에 뒤지지 않는 우리 전통술들이 이젠 그 명목을 유지하고 있지 않다. 박목월의 시에 나오는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은 이제 볼 수 없다. 그러나 이 집 장원 순두부에서는 술이 익고 있다. 매우 다행한 일이다. 다만 너무 많이 마시면 앉은뱅이가 되는 봉변을 당할 수도 있으니 조심!
장원 순두부 집의 콩국수는 면을 소면보다 좀 더 굵은 면으로 쓴다. 소면의 착착 와 감기는 맛은 아니지만 입 안에 차지게 들어오고 제법 무게감 있어서 좋다. 그리고 뒤에 오는 콩국의 고소함.
나는 여름철 들이키는 청량음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건강에도 좋지 않고 마시고 난 후 오히려 청량감이 사라진다.
하지만 콩국은 좋아한다.
콩국수를 먹고 나면 내내 시원한 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 콩이 갖고 있는 열을 풀어 주고 진액을 보하는 성분이 그렇게 작용하는 것 같다. 콩을 갈면 거품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사포닌이라는 성분 때문이다. 이 성분은 인삼에 많다. 때문에 콩을 먹으면 인삼을 먹는 것과 거의 같은 효과를 볼 수도 있다.
또 몸에 있는 나트륨을 체외로 내보내고 소변이 시원하게 잘 나오게 한다. 그러니 여름에 콜라 사이다를 찾는 분들이 콩국을 좀 드시는 것이 더 좋지 아니한가? 여기에 장원 순두부 집 특유의 차갑게 식힌 약초차로 마무리하면 한 여름 걱정은 없다. 아니면 이열치열. 이 집의 구수한 숭늉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좋다. 이 집은 들어가기 전부터 항아리와 가마솥이 큼직한 것들이 있고 실제 밥도 가마솥 밥이고 장도 직접 담그고 콩도 직접 재배한다고 한다. 전통적인 맛에 분위기가 그만이다.
정장로에서 옛 소방서 사거리를 지나 신천 쪽으로 조금 가면 오른쪽에 충남칼국수가 있다. 이 집은 전에는 그 맞은 편에 있었지만 가게를 늘려서 옮긴 지 꽤 됐다. 옮기기 전에 처음 아버님을 따라 가서 칼국수와 콩국수를 먹게 됐는데, 그 쫄깃하고 탄력 있는 칼국수 면발에 반했다. 이 집은 그 당시 칼국수 면을 그대로 콩국수에 썼는데, 정말 맛있었다. 지금도 그 칼국수 면에 콩국수를 해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좋은 면발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다른 집으로 바뀌었지만 어수동 사거리, 전에 부대찌게 편에서 소개한 실비집 옆으로 난 골목을 따라 쭉 가면 오른 편에 있던 칼국수 집도 칼국수 반죽을 잘하고 칼국수 국물도 맛있었고 콩국을 부어낸 콩국수도 쫀득한 면과 잘 어울려 잘 찾아가던 집이었다. 이 집도 역시 아버님 때문에 알게 됐다. 그러나 이제는 없어진 지 오래. 아흐, 아쉽다.
전에 부대찌게 편과 해장국 편에서 소개했던 전주콩나물식당의 콩국수도 좋다. 이 집은 열무국수도 맛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열무국수보다는 콩국수를 좋아하는지라 가면 꼭 콩국수를 주문하는데, 소면을 삶고 찬물에 넣어 푸는 타이밍을 잘 맞춰주는 덕에 한 대접을 다 비울 때까지 국수가 퍼지지 않고 입에 착착 부대낀다.
콩국수를 즐기는 내가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콩국수를 여름 한 철만 맛볼 수 있다는 점이다. 보통 빠르면 5월말에서 6월에 시작하여 9월 초까지만 콩국수 시즌이다. 영랑의 시처럼 그러면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 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를 외칠 수 밖에.
그러나 이 곳 말레이시아에서는 날이 더운 덕분에 콩국수를 찾는 교포들이 많은 터라 한국 식당에 가면 언제나 콩국수를 먹을 수 있다. 장원 수두부, 충남 칼국수, 전주 콩나물 식당 같은 맛은 안 나고 내 고향 동두천의 식당에 앉아 조간 신문을 보며 느긋하게 콩국수를 기다리는 재미는 없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외국 생활에서 그나마 느낄 수 있는 호사로 생각하고 만족할 뿐이다.
콩국수는 내가 중독된 몇 안 되는 음식의 하나이다. 희뿌연 색깔이 꼭 마약 같이 중독성 있다는 생각을 하며 웃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마약과는 다르게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지 않고 이국 열대의 더위에 지친 내게 좋은 영양분을 주고 흐뭇함을 준다. 이 아니 좋을시고.
- 이전글The Christmas Song Nat King Cole & Christina Aguilera version 입니다 09.11.02
- 다음글이담만유 11. 후루룩, 국수예찬 1. 파스타, 파스타. 바스타, 바스타. 09.10.31
댓글목록
신동수님의 댓글
신동수 작성일경이로운 정수구님! 내가 좀 한가해지면 '이담만유' 전편을 통독할 작정이랍니다. ^&^
조월태님의 댓글
조월태 작성일
정수구는 역시 정수구다<br />
맛과 멋, 맛에 대한 스트리, 본인의 맛에 대한 심오한 철학과 동감성 객관성<br />
어런 전차로,,, 향후 음악 칼럼외에도 가령 "맛의 전설": 맛 따라 풍류따라 음악 따라 "" 맛의 전설 따라 삼천리" " 잘 먹고 잘 듣기" 등등<br />
이런 연재기 묶어서 맛과 풍류, 음악을 아우르는 책 한권 낼 수 있는 훌륭한 기량이 엿보이네<br />
우리 합창단의 낭만자객 풍류객 그대을 위하여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