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담만유 7. 슬퍼라, 잊혀지는 것들은 2. 속초분식과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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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안개 속에 있는 것 마냥 흐릿한 기억들이 향수를 자극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난 그나마 남아 있는 소중한 기억들에게 감사한다.
가장 기억에 남은 외식은 무엇이었을까?
언제나 내가 좋아했던 풀빵일 수도 있고 지금 창말의 정육점이었던 경북상회에서 여름철 잠깐 팔았던 빙수일 수도 있고 미식가이자 애주가인 아버지를 따라 가서 먹었던 불고기나 또는 한정식일 수도 있겠고 지금 보산동에 있는 오래된 양식집인 56하우스의 햄버거나 스테이크일 수도 있겠다. 또 전편에 '창말 블루스'에서 언급한 창말의 태극식당이나 우리식당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아마 속초분식이라는 식당이 아니었나 싶다.
속초분식은 지금 단위농협이 있는 큰 시장에서 어수 사거리로 가는 길의 왼쪽에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1층이었는지 반지하였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기억나는 것은 주인이 열대어를 좋아했었는지 작은 열대어들이 헤엄치는 아담한 수족관이 벽과 칸막이에 놓여있는 것이 독특한 집이었다.
항상 이 집에 갈 때는 어머니의 치마자락을 붙잡고 갔었다.
당시 여자로서는 키가 크고 머리카락도 갈색이고 피부도 희고 코가 쑥 올라가 높았던 어머니는 매우 서구적인 용모였고 옷도 맵씨 있게 입으셔서 멋장이로 통하셨던 것 같다. 일주일에 한 번 씩 양산을 쓰고 나나 누나를 데리고 큰시장과 중앙시장에 나가셔서 옷을 고르고 구경도 하시고 하셨다.
그런데 어머니를 따라 나가자면 한 가지 통과 의례가 있었다. 바로 내 밑의 여동생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다. 나는 그나마 걸어다닐 수 있었지만 동생은 걷기에는 아직 어렸다. 그리고 바람만 살랑 불거나 옆에 낯선 사람들이 지나가기만 해도 빽빽 울어대는 통에 지고 업기도 곤란하고 어머니의 거의 유일한 낙을 방해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내가 한 5분 먼저 대문 밖으로 나가 있고 동생을 식모 누나가 업고 있으면 어머니가 나오셨다. 대문 밖에서 랑데뷰에 성공한 모자는 철길을 넘어 손을 잡고 정류장 쪽으로 가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었는데, 어느 때는 어머니의 외출을 감지한 동생의 곡성이 뜰에 낭자하게 울리는 것도 무시하고 나가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따스한 봄날 모자의 데이트가 시작되는 것인데, 나도 어머니가 데리고 나서시기에는 약간의 하자가 있는 몸이었다. 먼저 약 15분 정도 되는 버스의 승차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멀미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어머니의 단골 포목점이나 양장점 (주로 해동상회, 해성상회의 간판들이었다.)에 들러 주인 아줌마들과 얘기하고 계시자면 내가 이제 그만 가자고 보채는 것이었다. 그래도 내 울보 동생에 비하면 양반 중 상양반이었지 싶다. 그 때의 훈련 덕에 나는 요즘도 여인네들과 쇼핑을 가면 잘 보채거나 성급하게 나서지 않는 스타일이라는 호평(?)을 받곤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천하제일 한량에 피양출신 낭만파 주먹들의 우두머리셨던 아버지에게 시집 오신 후 이런 저런 일들로 상심이 있으셨던 것 같다. 어머니의 걸음은 느릿느릿했고 시선은 먼 산 바라보는 시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걸음으로 시장통을 다니시면서 이것저것 사고 옷도 입어 보시는 걸로 상심을 달래셨던 것도 같다.
이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동생을 달래줄 조그마한 뇌물이었고 그리고 마지막에 들르는 곳이 주로 속초분식이었다. 어머니는 속초분식의 어항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보시곤 하셨다. 홀린 듯이. 매번 가도 역시 신기한 것이 살아 있는 물고기들인지라 나도 역시 어항 속을 보는것이 재미있었다. 속초분식의 주메뉴는 짜장면과 우동이었고 모르긴 몰라도 칼국수나 수제비도 팔았던 것 같다.
일곱 살이 돼서 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가끔씩 어머니를 따라 시장엘 가고 속초분식엘 들렀다. 아마 5학년 정도까지도 속초분식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면 내가 그 정도 돼서 속초분식을 가지 않았던지.
4학년 5학년이 되고 오후 수업이 생기면서 어머니와 나와의 데이트 횟수는 줄어갔다. 나는 수업이 파하면 버스를 타고 웅변학원에 갔다. 지금은 핸드폰이 있어서 부모와 자녀가 연락을 해서 픽업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문명의 이기란 주로 가족의 단결을 해치는 법인데 이런 경우는 순기능을 하는 것 같다. 아, 그 때 핸드폰이 있었다면 나는 어머니와 더 많은 데이트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속초분식도 더 많이 갈 수 있었을 테고 다른 단골집도 많이 행차했을 것이다. 그럼 어머니와의 추억이 더 많았을 텐데...
6학년이 돼서 서울로 전학갔다. 어머니와의 외출은 이제 먼 나라 얘기가 됐다. 이제 2학년이 된, 그러나 여전히 울보인 내 여동생이 어머니의 오른쪽 치마자락의 새로운 주인이 됐다.
중학생이 돼서 다시 동두천에 돌아왔어도 이젠 내가 어머니와 외출하는 것 보다는 친구들과 노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됐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공부하지 않는다는 야단도 더 많이 맞으면서 어머니와의 외출은 어쩌다 가물에 콩 나듯이 철 바뀌면 같이 옷 사러 나가는 정도에 지나지 않게 됐다. '어차피 공부도 하지 않았는데 억지로라도 좀 데리고 나가셨으면 어때? ' 하는 생각이 지금 퍼득 든다. 허허.
어머니와 외출을 하고 싶다.
실제 한국에 가끔 가면 무언가를 함께 사러 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어머니의 연세는 일흔을 훨씬 넘긴 연세인지라 나의 발걸음의 빠르기를 감당할 수 없고 예전의 그 먼 코스를 소화하기 힘드신 연세가 되셨다. 또 아무 곳에나 모시고 싶지 않고 더 좋은 것을 사 드리고 싶은 아들의 심정도 모르고 약간 고급한 곳으로 가자면 내 주머니를 염려하신다. 그 정도 사 드리는 것은 요즘 내 벌이에 아무렇지도 않은데도 펄쩍 뛰시며 짐짓 싼 것이 먹고 싶다고 하신다. 서운하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다.
이제 어머니와 볼 날들이 불행하지만 많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어머니가 아버지 때문에, 우리 자식들 때문에 특히 나 때문에 감내하셔야 만 했던 슬픔과 외로움과 결핍을 메꿔 드리고 싶다. 그나마 미래를 기대했던 막내 아들의 방황을 10년 넘게 보아오시느라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
아, 하나님, 어머니 아버지를 제발 좀 더 늦게 데려가 주십시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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