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담만유 7. 슬퍼라, 잊혀지는 것들은 1. 포장마차 창말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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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수구
댓글 1건 조회 3,076회 작성일 09-10-2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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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은 형태가 없고 꺼내 놓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다.

 마음이란 두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추억이란 이 곳 저 곳에 점점이 뿌려질 수도 있고 겨우 내 숨어 있다 이내 움트는 버들강아지 같아 적당한 조건만 맞으면 비비고 나와 마음 한 모서리의 슬픈 상처에 상념이란 무딘 칼로 베어내는 아픔을 선사하고 가는 것이다. 추억이란 없어져 버린 사물에 대하여 고개를 더 빳빳이 드는 법. 이제 만날 수 없는 사람, 이제 볼 수 없는 것들, 이제 갈 수 없는 곳에 대한 추억은 쓸쓸한 불길 마냥 가슴을 태운다. 추억은 불우한 적의 추억이라야 더욱 그 서슬이 사납다.


 대학 다닐 때 자주 가던 목로 주점들이 있었다.


 그 중 몇들은 아직도 남아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사라진 곳이 태반이다. 합창 연습을 끝내고 새벽을 기다리면 술을 마시고 고래처럼 노래부르고 웃고 울던 집이 나그네 파전이란 곳이었다. 두어달 전 한국에 가고 한양대에 간 김에 후배들과 늦게 술을 먹고 일부러 그 집에 들렀다. 그러나 이미 집 주인이 바뀌었다고 했다. 전에 갔을 때, 술 잘 드시고 실수를 종종 해서 아줌마한테 잔소리 듣던 아저씨는 돌아가시고 아줌마도 편찮으시다고 했고 안면이 오래 익은 아드님만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젠 아주 그 아드님 마저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컴비네이션 피자가 부럽지 않았던 바삭한 파전에 막걸리도 좋이 마시고 시원하게 냉동한 얼음소주에 조개탕 국물 깨나 마시던 집이었다. 독문과 후배들과 들러서 시를 얘기하고 소설을 얘기하고 합창단 사람들과 들러서 밤새 노래하던 곳이었는데 이젠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아아, 내가 너무 나이가 든 것일까?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는 탓일까?


 그래도 그 집은 옥호屋呼라도 보존하고 있는 경우이다.


 다시 생각하면 아깝고 아까운 곳이 동두천의 포장마차 창말집이다. 어디 그 집 만큼 맛나고 친절한 집이 그 집 뿐이었을까마는 그래도 단골의 심사는 그게 아니다.


 바다상가 뒷쪽에서 터미날 뒷쪽으로 통하는 좁은 골목 양편에 포장마차들이 있었다. 내가 자주 가던 곳은 창말집이었다. 내가 살던 곳이 창말이었고 주인이자 셰프인 분이 동네 어른이었고 내 동창 가시내의 어머니였다. 어려울 만 하건만 내게는 편했다. 어머니라 불렀다. 같은 교회를 다녔기에 집사님으로 부를 만 하건만 그래도 술을 마시는 입장에서 민망했나 보다. 어머니란 호칭으로 불렀다.


 


 근 10여년을 다닌 것 같다.


 그 10년은 내게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다. 또 인생의 가장 이름다워야 할 시기였다.


 대학을 졸업할 당시부터 난 가장 친한 친구들과 이 집에 들러 소주를 마셨다. 영화판의 제작부장, 기타를 신묘하게 치고 사람을 즐겁게 하는 개그 본능의 소유자, 타고난 장사에 만능 운동선수, 그리고 남자로 태어났으면 우리들을 부리며 보스 노릇을 했을 비올라 전공에 그림을 잘 그리던 친구 모두 다섯이었다.
 이 다섯이 때로 몽땅 때로 둘셋씩 모여 이 집에 와서 함께 있는 오롯함을 즐기다 가곤 했다.
 또 친구의 동생들도 이 집의 단골들이라 우리를 아는 사람들은 우리를 찾으려 죄다 이 집으로 모여들곤 해서 마치 우리 일당들의 연락 사무소 역할도 했다. 슬프도록 아름답고 아름답도록 슬픈 날들이었다. 아니 젊은 날은 슬프고 아름답기 마련이었다.
 우리는 웃고 떠들었지만 가슴 속은 시린 구석들이 있었다. 어떤 이는 가난했고 어떤이는 미래가 불안했고 어떤이는 슬픈 사랑을 하고 있었고 어떤 이는 집의 일로 주저앉아 있었다. 그 쓰린 속들을 함께 있는 것만으로 달래던 날들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속들을 알고 있었고 아픔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의 아픔을 술 한 잔으로 함께 아파했다. 쓴 소주가 들어가면서 생기는 그 알싸한 아픔을 나누어 간직했다.


 소주를 무슨 맛으로 마시느냐는 사람들이 있다.


 소주를 미각味覺으로 대하려는 것 만큼 미련한 행투도 없다.


 소주는 통각痛覺으로 맛을 느낀다. 소주가 주는 아릿한 비명 같은 맛을 즐기는 것이다. 위스키가 주는 독함과는 다른 것이다. 위스키나 꼬냑은 일단 그 향이 있다. 그러나 소주는 향을 즐기는 술이 아니다. 꼬냑처럼 입에서 돌리는 술이 아니다. 그렇다고 보드카 처럼 완전히 속을 깎아내는 술도 아니다. 정종 같이 맹하지도 않다. 소주의 맛은 무향이요 무미함이다. 그리고 알맞게 독하다. 요즘은 20%도 안되는 소주들이 나와서 한 잔 마시고 캬아~ 하며 진저리를 치며 만사를 잊게 하는 통쾌함은 사라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소주가 주는 처연한 가슴 속 비명에 취하고 위로의 말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했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창말집에서였다.


 창말집의 안주는 평범했지만 맛있었다.


 석굴을 시키면 반을 갈라 뚜껑을 따낸 석굴에 고추와 마늘을 잘게 썰어 보기에 컬러풀하고 맛있게 내주셨다. 진주빛 넓은 딱지에 파란 고추, 희노란 마늘, 빨간 초고추장이 탄력있는 생굴의 몽환적인 회색과 같이 올라 앉은 모습이 벌써 술꾼들의 입맛을 돋군다. 칠천원이면 큰 접시로 하나 담겨왔다.


 고갈비도 멋진 풍미를 지닌 먹거리였다.


 맛나게 양념한 고등어를 호일에 싸서 불위에 구워서 내면 짭짤하고 매콤한 양념이 고등어의 살과 어우러져 깊은 맛을 냈다. 냉동실에 깊이 간직하셨다가 우리가 들이닥치면 소금을 구워서 그 위에 올려 구워 주시던 대하구이도 지금 생각난다. 생 대하 구이만큼 쫄깃했다. 메추리 구이도 좋았다. 메추리를 뼈채로 잘게 칼등으로 친 다음 참기름과 소금, 후추로 양념하고 구워주셨는데 그 냄새에 지나가던 취객들이 다시 한 잔하러 들어오곤 했다. 가끔씩 물 좋은 것이 들어오면 회로 주시던 병어, 쫄깃한 소라, 매콤달콤한 오돌뼈가 선하다.


 가르치던 녀석이 아리따운 여대생이 되서 동두천엘 왔길래 데리고 가서 처음 같이 술 먹은 곳이 창말집이었는데, 그 아가씨는 정신이 확 들 정도로 매운 닭발을 맛나게 입맛을 다셔가며 먹었다. 이 닭발은 생각 외로 공이 많이 든다. 많은 양의 고추가루와 조청이 들어간다. 친구 동생인 지철군은 나보다 더 창말집에 자주 들르곤 했는데 술만 들어가면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내게 담배를 극력 권하는 게 그의 악취미 중 하나였다. 그의 집에 유하면서 같이 일을 하던 용재군도 창말집 닭발의 팬이었다. 흐리거나 비 오는 날 소주와 닭발을 겸비하고 앉아 술을 들이키며 나를 놀리거나 했는데 후배를 놀리는 것보다 선배를 희롱하는 재미가 아마 쏠쏠했던 모양이었다. 이 악동 두 사람 다 좋은 술친구였다. 


 여하간 싼 값에 맛난 안주를 먹을 수 있었고 몇 시간을 앉아있어도 싫은 내색하지 않는 어머님이셨던지라 거의 매일 발도장을 찍었다.


 시간을 흘러가 이십대 중후반의 우리는 서른 중반을 넘기면서 자주 보지 못하게 됐다.


 영화 제작부 소속인 오랜 친구는 영화일로 동두천을 자주 떠나 있었다. 기타를 잘 치던 친구는 이리저리 터전을 옮겨 다니느라 자주 보지 못했다. 무슨 일이 생겨서 다시 동두천으로 돌아올 때면 그 친구의 얼굴은 더 초췌해져 있었다. 체육학을 전공한 친구는 대기업의 리조트 사업부로 배속이 되서 멀리 무주로, 가평으로 가 있게 됐다. 비올라를 전공한 홍일점인 친구는 시집을 갔다.


 나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정말 죽지 못해 살 수 밖에 없던 때였다.


 모든 것을 접고 웅크리고 학원에서 강사일을 하고 가끔 지휘봉을 들고 지휘를 해서 생활했다. 오기는 창창했지만 내일이 안 보였다. 한 마디로 지랄같았다. 그래도 나를 믿어준 후배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쓴 소주 마시던 곳이 바로 창말집이었다.


 무슨 얘긴지 창말집 어머니와 도란도란 얘기도 많이 했다. 나는 혼자서도 많이 찾아갔다. 워낙 책을 손에서 놓으면 불안해하는 희한한 족속인지라 포창마차에서 소주 마시며 책을 보는 기묘한 광경을 잘 연출하기도 하고 옆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던 후배들이 다시 내게로 와서 마셔대는 통에 인근 포장마차 아줌들도 모두 날 알아보고는 이리 와서 마시라는 호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뻔한 창말집 단골로 호가 나 있었으니까.


 창말집 어머니의 바깥 어르신이 돌아가셨다. 마나님 속을 무진 썩이시던 양반이지만 하루 세끼 꼭 당신의 손으로 식사를 드렸던 어머니는 정읍이 고향인 천상 음식 잘 하고 남편 받드는 전라도 아낙이었다. 여기저기 목디스크니 뭐니 몸이 편찮으시다고 했다. 적지 않은 연세에 그 좁은 곳에서 연탄을 피워놓고 불편하게 일하신 데다 잠도 편히 못 주무시고 새벽에 잠깐 눈 붙이셨다가 바깥양반 아침 드리고 시장 보고 어쩌고 하시면서 이십여년을 사셨으니 몸이 안 좋으실 밖에. 결국은 의정부에 있는 따님의 집으로 가셔서 창말도 떠나고 창말교회도 떠나고 창말집도 손에서 놓으셨다.


 얼마전 그 터에 가 보니 한 때 벅적이던 젊은이들은 신시가지로 갔고 지금은 거의 모든 가게들이 없어졌다.


 나는 지금도 십여년을 쓰던 뱀가죽 지갑이 있다. 쓰기에는 너무 낡아서 책상서랍에 두고 다니지만 그 지갑을 갖고 다니던 어려웠던 때를 잊지 않으려 한다. 지금 가끔 옥배에 미주를 따라 마시지만 창말집의 소주맛을 잊지 않으려 한다. 가슴 아프고 어렵고 남루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름다웠다. 뱀가죽 지갑 마냥 기억의 서랍 속에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두고 두고 보면서 꺼내 보려한다. 그래야 할 것 같다.


 이제 마흔 하나가 됐다.


 언제까지 동두천을 지키면서 창말집의 단골로 남을 것 같던 내가 가장 멀리 나있게 됐다.


 그 때 같이 술 마시던 친구들, 함께 말 없이 잔을 기울이던 여인들, 선후배들이 모두 건재하고 건승하기를 바란다.


 추억이 아름다울수록 왠지 스산한 아픔이 피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창말집이 없어졌다는 것은 내게 2,30대의 기억이 추억으로 추상화된다는 것이고 이제 밀려오는 현실에 부딪혀 여지 없이 밀려나는 과거를 다만 추억으로 간직해야 한다는 준엄한 명령의 어쩔 수 없는 체화體化이다. 추억을 추억으로 넘기고 미련은 버려야 하나 보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시간이 지나가고 생과 사가 있기 때문이란다. 사라지는 것들은 서럽고 안타깝다. 그러나 그래서 아름답다. 아, 나는 다시 창말집과 같은 단골집에서 어떤 아름다운 이들과 흐릿한 백열등 아래 쓴 소주를 마시며 흐뭇한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리


 


사랑은 가도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밴치 위에


나뭇잎이 떨어져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의 사랑이


사라진대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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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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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신중님의 댓글

권신중 작성일

세월이 가면 이라는 말의 여운이 이 시처럼 짙게 베어나올 다른 글이있을까?<br />
글을 읽다보니 형이랑 다녔던 곳곳이 생각나네...<br />
<br />
어릴때의 기억이 오래 남아있는 동네가 원형이 유지된다는게 신기하다 싶으니<br />
슬슬 없어져 가고 있지요.<br />
<br />
지금의 모습은 지금 어린애들의 추억의 원형이 될테고..<br />
그건 그들의 몫이겠거니..<br />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