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담만유 17. 馬車山愁(磨釵山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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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수구
댓글 2건 조회 3,168회 작성일 10-01-2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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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두천은 사방 6개의 산에 둘러싸여 있다.


 북서는 마차산(해발 580미터), 북으로는 소요산(587), 동으로는 국사봉(754), 동남으로 왕방산(737), 남동으로 해룡산(660)이 있고 남남동에 칠봉산(518)이 있다. 여기 남북으로 관통하며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신천이 흐르고 국사봉과 왕방산에서 흐르는 물이 동두천을 이루어 신천에 합류한다. 전체적으로 남북으로 생긴 긴 교통로인 추가령 구조대가 아늑한 산들에 둘러싸인 분지를 만난 형국이다. 남쪽과 남서쪽은 신천과 신천 양안의 좁은 평야가 있고 상대적으로 낮은 산지가 있어서 숨통이 터지는 느낌이다. 또 마고개를 지나 은현면과 닿거나 멀리 파주나 연천군의 남서쪽과 닿는 마차산 배후의 긴 협로를 통할 수 있는 곳이라 꽉 막혔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북으로는 마차산과 소요산이 신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곳인 창말과 봉암동 주변의 작은 구릉지를 빼고는 마치 관문처럼 맞닿아 닫혀있는 모양이라 북방세력에 대한 현저한 요새지대가 될 수 있다. 임진강과 한탄강을 통과한 적은 다시 소요산 북쪽의 종현산 인근의 방어선을 뚫어야 한다. 이곳은 열두개울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신천과 만나는 굽돌이를 형성하고 있으며 배후에 험한 산지를 끼고 있어 군사적 요충이 된다.



 그러나 이곳을 돌파한다 하더라도 말뚝고개라 이름한 연천군과 동두천 사이의 고갯길을 통과해야 한다. 이 말뚝고개의 이름은 말턱고개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양서 원산을 가자면 반드시 이 추가령 구조대를 지나야 하는데, 의정부를 거쳐 동두천을 지나서 연천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이 고개는 고갯길이 길고 험해 말의 숨이 턱까지 오게 된다고 한다. 신천의 수로를 이용하자니 가뜩이나 낮은 신천의 하상에 여기저기 산재한 용암이 흐르며 남겨둔 돌에 부딪치기 십상이고 또 곳곳의 여울이 험해서 宮家에서 부리는 솜씨 좋은 사공이나 든든하고 날렵하여 여울과 협곡을 잘 스쳐가는 貨船이 아니라면 좀처럼 지나기 힘든 물길이다. 그래 별 수 없이 이 서울서 원산 가는 길을 가려면, 아니면 그 중도에 있는 삼방협이나 금강산을 가려면 이 고개를 사람이나 말이나 숨이 턱에 차도록 넘어가야 했다. (
말뚝고개 넘기 전에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산길은 우리 동두천 사람들만이 아는 작은 계곡이 있는 쉼터였다. 한창 혈기 방장하던 학생 때 친구들과 텐트를 치고 하루 이틀 지내기도 했다. 창말에서 가까운 고로 교회 수련회도 자주 갔기에 골속골속 골짜기도 친근하고 깊숙한 곳도 들어가 보기도 했는데 골프장이 생긴다고 파헤치고 어쩌고 한 이후로 20년 전부터는 들어가 보지를 않았다.)


 


 이처럼 동두천은 북쪽에서 오는 위협세력에 대한 좋은 방어지가 될 수 있으므로 삼국시대 이후로 마차산 주변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한 기록이 꽤 있다.
 감악산 동쪽 계곡의 길로 하여 양주로 빠지거나 파주로 통하는 감악산 서쪽 길, 아니면 적성에서 전곡 양원리로 가다가 오른쪽 길로 빠져 남으로 동두천 남서방면이나 봉암리(소요산 아래의 봉암과는 다르다. 우리 나라에 봉암이라는 지명을 찾으면 수 백 개는 나올 것이다)로 이르는 마차산 후면의 간파리 길로 이르는 길이 임진강을 건너기 좋은 여울이 있는 고랑포에 가깝다
 
 삼국시대가 끝나가면서 신라의 국력이 한강 유역을 점유하도록 왕성해가고 고구려가 중국의 대국과 문명 대 문명의 사투를 벌일 때 고구려군이 언제나 주공으로 삼은 것이 바로 적성에 있는 칠중성이다. 또 신라의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김유신 장군이 고구려로 침입하여 평양 포위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당나라의 병력에게 보급품을 전달하기 위해 겨울철 상상을 불허하는 보급작전을 펴면서 고구려 국경을 넘은 곳이 이 지점이다.
 다시 십여 년 후에 신라와 당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도 이 부근은 양군의 정예병력이 뿌린 피로 다시 얼룩져야 했다. 전곡에 집결한 병력이 한탄강을 건너 서울로 진입하기 위한 가장 좋은 접근로인 동두천-의정부 축선으로 가기 좋은 곳에 위치한 마지막 요해지에 마차산이 있다.


 

그래서인지 마차산에서는 옛날에 쌓은 보루의 흔적이 여기 저기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이 보루의 흔적이 계단식 논의 축대로, 무심한 돌무더기로, 집의 주춧돌로 남아있다.


 


 흥미로운 점을 하나 보자면, 지금 신흥학교 근처의 안흥리에서 산정으로 향하는 미디안 기도원이 있는 길 말고 더 왼쪽으로 십 리 좀 안되게 냇물을 따라 들어가면 마차산 남동사면에 아름답게 펼쳐진 분지가 나오는데 여기가 윗 안흥리이다. 여기는 마차산의 군사적 위치의 중요성과는 별개로 왠지 별천지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여기는 십승지 정도는 안돼도 난리를 피할 만한 곳이라 여겨진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나 할까?


주변에서 이곳 같은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곳으로는 감악산 주변 봉암 저수지 안쪽으로 들어가서 보이는 지역이 은둔하기 좋은 곳이라 생각된다. 다만 이 곳은 약간 협소하고 그늘진 곳이라는 느낌이 있는데 여기 윗 안흥리는 협소하다거나 그늘진 느낌이 들지 않는다. 화창하고 포근한 느낌이 든다. 요즘 전원주택들이 많이 들어서고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차산의 산의 생김은 안온하고 편안하다. 특히 창말서 보자면 이 산은 어깨가 편안하고 웃음이 넉넉한 할머니를 생각나게 한다. 어릴 때 돌아가신 할머니의 사진에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고개를 표나지 않게 옆으로 기울인 모습의 사진이 있는데, 마차산을 볼 때 마다 그 사진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창말에서 보는 마차산은 그 다정히 벌린 팔 아래 자식이나 손자들을 거느리고 있듯이 작은 산들을 끼고 있다. 심지어 그 가슴에 안겨 있듯이 작은 산이 혹처럼 솟아나 있기까지 하다. 이 조그만 혹 같은 봉우리는 뒤로 마차산이 있고 양 옆에 좌청룡 우백호가 되는 산들이 가리고 섰는 데다가 그 앞으로 신천이 흘러 동향인 것만 뺀다면 좌청룡 우 백호 배산 임수의 완벽한 지세이다. 혹 까마득한 옛날 거인과 신들의 시대에 누군가가 일부러 이 봉을 쌓아 무덤을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허튼 생각도 들게 만든다.


그도 무리가 아닌 것이 이 마차산은 지금은 말 마馬에 수레 車를 쓰지만 원래 磨山이라고 한다. 釵자는 채라고도 읽고 차라고도 읽는데 비녀를 뜻한다고 한다. 옛날 마고할미가 이 산에서 쇠막대를 갈아 비녀를 만들었다고 한다. 마차산의 모습이 할머니를 연상시키는 것이 다 이유가 있구나 생각하게 된다. 마고할미란 우리나라나 중국의 신화에서 볼 수 있는 태초의 여성신이다. 때로는 어이 없을 정도의 큰 몸집의 소유자로, 혹은 다산을 상징하는 여신으로, 혹은 모계 부족의 족장이나 숭배 대상으로 여겨지는 신화 속의 캐릭터인데, 그 마고 할미가 비녀를 갈았다는 것은 아마도 이 비녀라는 것이 갈고리가 달린 작살 같은 병기를 상징하기도 하는 바(수호전의 사냥꾼 출신 양산박 두령 해진, 해보 형제가 바로 이 차叉의 대가이다.), 단군(고유 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고조선의 칸汗)이 이끄는 북방세력에 복속된 토착 세력의 잔여 세력들이 여기서 권토중래를 꾀한 것은 아닐까 추측도 해본다. 언제나 역사에서 if의 문제는 재미있으니까. 그렇다면 한반도와 만주에서 널리 발견되는 거석문화의 중심 세력들이 자기들 족장의 무덤을 썼다면 이 곳도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역시 즐거움 밖에 남지 않는 역사의 상상이다.


 


어릴 때 마차산에 자주 오르내렸다. 물이 마른 가을이나 봄날 둑을 건너 친구들과 오르기도 했다. 진달래가 유독 고운 산이었고 산벚의 단풍이 아름다운 산이었다. 또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이 가끔 큰 솥을 지고 올라가 닭을 삶아 죽을 끓이던지 고기를 구워 드시던 그늘진 계곡이 있던 곳이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제 아버지들을 따라가 맛있게 먹던 닭죽 한 그릇이 생각난다.


그리고 맑은 약수가 정갈하게 솟던 샘터도 여럿 있었다. 지금 이 계곡이 있는 선행사 올라가는 길은 많이 더럽혀지고 물도 상류의 목장 때문에 탁해졌다. 약수가 솟던 샘은 더러운 구덩이로 변했다. 아는 분이 선행사 지나 더 윗쪽에 집이 있었다. 그 댁에 같은 교회 다니는 청년들과 함께 가서 안마당 화덕에 고기도 구워 먹고 바로 옆 계곡물에 탁족도 하고 하루를 보내기도 했는데, 그렇게 물이 시원하고 좋았다. 그나마 위로가 된다.


 


여기 선행사 오르는 길보다는 측면의 길들이 등산로로 자주 애용된다. 전에 마차산은 등산객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늘어난 등산인구와 편리한 교통 덕에,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점점 알려지고 있는 추세이고 등산로 안내 표지도 생기게 됐다. 주로 소요산 역에서 내려 신천을 건너 소요초등학교를 지나 황하터에서 언덕 위에 있는 교회를 지나 오르는 길이나 아니면 계곡 따라 더 올라가서 등산로로 진입하는 길이 있다.
 이곳 황하터는 옛날 황희정승이 잠시 살던 곳이라 황아터 또는 황하터라 불리기도 하는 곳이데, 황희 정승네 터가 황희 터로 변하고 그것이 황하터, 황아터, 심지어 황터로 명칭이 변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여기는 뒤로 산이 있고 앞으로 강이 유유히 지나는 데다 가까운 곳에 계류도 있어서 눈이 시원하고 마음도 다사로와지는 곳이다. 황희 정승이 사셨던 곳이니 그 지혜있는 선인이 오죽 좋은 터를 보아 사셨을까,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곳이다. 지금은 옛날 보던 풍경을 보기 힘들다. 현재의 지형과 지세에 비춰 생각하건대 참 좋은 터였음은 분명하다.
 


소요초등학교 뒷편으로 안골 가는 길도 좋은 산책로이다. 다만 옛날 일제시대 때 이곳에는 백백교라고 하는 사이비 종교단체가 집단으로 거주하던 지역이라고 한다. 이 백백교는 교주가 여신도들을 농락하고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의심을 품는 신도들을 가차 없이 살해한 것으로 엽기적 센세이션을 일으킨 종교이다. 이들 무리는 일제 경찰에 의해 철저히 흩어지고 처벌 받았으며 이들이 집회를 가지던 동굴은 철저히 훼파됐다고 한다. 이 동굴은 소요 초등학교에서 보자면 북서쪽에 보이는 마차산 연봉이 신천 쪽으로 절벽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 있는데 그 절벽 바로 아래 지금 돌 무더기가 가득하게 쌓여있는 곳이라고 한다. 자세한 것은 동리 노인들께 여쭈어야겠지만 아직 실제 탐문 수사를 벌인 적은 없어 카더라통신에만 의존한 얘기다.


 


아무튼 이렇게 능선을 타고 정상에 오르면 그 장쾌한 맛은 6백 미터도 채 안 되는 산이 주는 경치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것이다. 주변에 첩첩으로 늘어선 산이 없이 독립된 산괴이고 북으로는 임진강과 한탄강, 연천, 장단이 보이고 서로는 감악산의 험한 산세가 손에 잡힐 듯이 보이고 있으며 동으로는 소요산이 마주하고 신천이 띠 같이 흐르는데 동두천 시가 온통 눈에 들어온다. 양주벌판과 불국산, 칠봉산, 천보산이 남으로 향한 눈에 선하게 들어온다. 게다가 경원선을 달리는 전철, 기차, 국도 3호선인 평화로와 산의 뒷면 간파리에 다니는 차량들이 모두 보이니 수도권에 이만큼 주변 경관을 시원하게 볼 수 있는 산도 드물다.
 여기서 오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서 소요초등학교 주변의 식당에서 맥주나 막걸리를 드시는 분들도 있고 소요산 유원지를 찾는 분들도 있다. 또 여기서 미디안 기도원쪽으로 하산하여 동두천 역으로 가는 분들도 있다. 아니면 다리 힘을 자신하는 분들은 정상에서 미디안 기도원 쪽으로 바로 내려가지 않고 노루가 다닐 법한 길을 이용해서 윗안흥리로 내려가 저녁시간마다 오는 버스를 타고 가시는 분들도 있다.


 


나는 전에 애견 베니와 함께 여기 윗안흥리에서 마차산 정상으로 오르려다 길이 착잡해져서 실패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내려와서는 동네 맨 위에 있는 다솜이란 식당에 들렀는데, 그 식당이 위치나 음식이 좋고 맘에 들어 그 후로 자주 왔었다. 심지어 주인 되는 분과 친해져서 우리 학교 합창단 후배들과 자주 MT도 오고 했었다. 산에 자그마한 식당이 걸려있고 묘목 재배장과 사슴 농장이 있고 정갈한 잔디밭과 아름다운 조각이 있는 곳이다. 이 산속에 이런 곳도 있구나, 탄성이 나오게 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알게 된 동아리 재학생 후배와 교제했었다. 그녀가 동두천에 오면 자주 여기에 왔었다. 주인장께서는 딸만 셋을 둔 처지라 역시 딸 셋 있는 집안의 장녀이자 여성의 몸으로 남자들만 득시글한 대학의 공대에 적을 둔 그녀에게 친절히 대해주셨고, 딸들의 공부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시고 진로도 물어보시곤 하셨다.


나는 그녀와 헤어진 후 몇 년간 이 곳에만 오면 가슴이 아팠다. 마음이 아픈 것이 아니라 정말 마음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곳이 몹시 아팠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찾아가지 않았다. 몇 년 후 마음이 치유됐다고 느껴졌을 때 다시 갔다. 그러나 같은 부위가 도려내듯이 다시 아파왔다. 목에 가시 같은 사랑이었고 가슴 속 미늘 같은 지독한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을 경험하게 해 준 그녀에게 감사한다. 그래서 이제 더는 그 아픔을 피하지 않으려고 한다. 설령 내가 지금 더 아름다운 사랑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녀와의 사랑은 그 순간, 인생의 단 한 순간을 아름답게 물들였던 것이었기에 이젠 그 사랑이 아픔으로 다가오더라도 그 아픔을 추억으로 되새길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가슴이 아려온다. 허허.


 


마차산의 정상의 장쾌함은 아까 얘기한 바 있지만 그 장쾌함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쓴 맛이 있다. 내려다 보이는 벌판의 풍경이 예전과 다른 풍경이다. 예전이라고 풍경이 그윽한 선경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정상에서 바로 아래 보여야 할 우리 옛 집터가 황량한 산업단지로 바뀐 것이다. 40년 전에 여기 태어나 바로 아래 신천에서 고기 잡고 유치원 선생님을 따라 병아리떼 처럼 화판 메고 사생 나가고 쑥 뜯던 식모 누나를 따라 나가 봄볕에 그을리고 철둑길로 따라가 소학교 다니고 또 그 철둑길로 역에 나가 기차 타고 서울 대처로 대학 다니던 내 눈에 마차산에서 바로 보이는 풍경은 아쉬움과 애써 외면하고픈 이름 모를 향수의 애석한 사라짐이다.


 


지금은 한국에 가더라도 마차산을 정면으로 보는 일이 많지 않다.


정면에서 보이는 푸근한 할머니 같은 인상의 산을 이제는 멀리서 옆에서 보는 일이 고작이다. 산에 오르는 일도 많지 않다. 마차산에 오른 지도 오래 됐고 지난 여름 휴가 때도 고작 다솜에 한 번 갔을 뿐이다. 주인 양반은 만나지 못했고 격렬한 아쉬움만 신선하게 느끼고 왔다.


 


소요산과 마주했지만 소요산의 이름에 밀려 제 이름 딴 동리나 역이나 정류장도 없는 산이 마차산이다. 심지어 마차산에 있던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세웠다는 빗돌도 인근의 큰 산 감악산에  뺏겼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마차산.


그리 높지 않은 산.


태평하고 안온하게 감싸안는 푸근한 느낌의 산이건만 기슭으로 등산객들을 잠아 끄는 식당가 하나 없는 산. 주변에 살던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 퇴색한 동리를 아우르고 있는 산.


그럼에도 나는 이 산을 사랑한다. 빈 들이라 더 머무르고 싶고 마음의 엉겅퀴가 있어 더 스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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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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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월태님의 댓글

조월태 작성일

향토 지리 역사 풍물 음식 해설가로세! 희미한 사랑의 추억도 담아내니  수필가로세!<br />
이담만유 지속적인 시리즈 연재 기다리겠네 늘 축복과 즐거움이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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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덕님의 댓글

유명덕 작성일

초등생때  초등학교 선생님이셨언  작은 아버지 동두천댁 근처 냇가에서 썰매 타며 놀 던 기억이 납니다  잘 읽 고 있씁니다